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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재판부 공격’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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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현일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현일훈 사회부 기자

현일훈 사회부 기자

‘이재용’ ‘정형식’. 지난 5일부터 두 개의 이름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올라있다. 정형식 부장판사가 재판장인 서울고법 형사13부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이후 벌어진 일이다. 이 사안과 관련한 댓글, 인터넷 커뮤니티 글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정 부장판사를 ‘적폐 판사’로 몰며 비난하는 내용이 주였다. 청와대 게시판의 ‘정 부장판사 파면’ 청원 글은 600건을 넘어섰다. ‘이 부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은 정경유착에 눈감고, 사법 정의를 부정한 것이니 봉고파직(封庫罷職)하라’는 취지다. “특별감사를 청원한다”는 글에는 10만명 이상이 동의 의사를 밝혔다.

6일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정형식 판사를 파면해 달라는 글이 올라 있다. [국민청원 사이트 캡처]

6일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정형식 판사를 파면해 달라는 글이 올라 있다. [국민청원 사이트 캡처]

워낙 국민적 관심이 지대한 ‘국정농단’ 사건의 한 축인 데다 항소심 선고 직전까지도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사건인지라 일면 이해가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문제는 비판의 근거와 수준이다. 현재 인터넷과 SNS에는 ‘법복 벗고 삼성에 입사해라’, ‘최고의 쓰레기는 판레기’ 같은 인신모독적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일부 네티즌은 신상털기에도 나섰다. 그의 ‘처형’, ‘사촌동생’이라며 출처가 불명한 사진까지 나돌고 있는 지경이다. 정치권과 법조계 일부 인사도 집단 이지메에 가세하고 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사법부 존중에 앞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정렬 전 판사는 “역대급 쓰레기 재판”이라고 했다.

서울고법은 공식 대응하지 않았다. 법원 관계자는 “주요 재판이나 영장실질심사 결과가 있을 때마다 이런 류의 ‘판사 여론재판’이 있어 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이 부회장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가 ‘신상털이’를 당하고, “아들이 삼성 취업을 약속받았다”는 거짓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조 판사는 아들이 없다. 같은 해 7월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블랙리스트 개입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황병헌 판사를 두고는 “과거 라면을 훔친 도둑에게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적이 있다”는 뉴스가 퍼졌다. 그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이 역시 가짜뉴스다.

이러다 보니 젊은 법관들은 아예 정치적으로 민감한 재판을 회피하려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판결이 나왔다고, 다른 잣대를 들이밀며 재판부를 뒤흔드는 행태는 법치주의의 적이다. 어느 날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 돌아올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지 갑갑할 뿐이다.

현일훈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