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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불 끄고 보자는"응급조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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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0일의 물가안정종합대책은 한마디로「물가정책」이라기보다는「응급조치」다.
큰 폭의 원화절상·원유가격의 하락 등 물가측면에서의 해외 호재에도 불구하고 금년 들어 가파른 오름세를 보이는 물가동향에 정부가 초조함을 느낀 탓이다.
원론에 충실하고 일관성 있는 물가정책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총선 뒤에 안정기조가 크게 흔들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단 취하고 본단기자적·개별적·가시적 방편들이다.
유가나 전기료·특소세 인하 등 이번 대책의 주요 골격을 이룬 수단들이 하나같이 인위적인「가격 끌어내리기」임을 보면 이번 대책의 응급조치 적인 성격을 잘 알 수가 있다.
유가를 10% 내리고 28개 품목의 특소세 탄력세 율을 30% 상한선까지 최대한 인하한다는 것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닥칠 물가불안을 치유할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이미 올 들어 2월말까지 년 율로 13·2%(1∼2월중 2·2%)나 오른 소비자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면 10%의 유가인하가 0·1%, 3%의 전력료 인하가 0·06%에 불과하고 특소세 인하는 실상 거의 기대할 것이 없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아는 정부가 그래도 에너지 가격과 특소세를 끌어내린 이유는 다만 「이렇게 내리는 물가도 있다」는 것을 당장 눈앞에 보여주려는 것뿐이다.
정부가 의도하는 대로 심리적 효과가 적지는 않겠지만 급한 김에 내릴 수 있는 요인들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내리는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히는 점도 적지 않다.
유가의 인하가 원유가 상승시의 완충지대를 좁혀놓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보다는 당장 에너지 가격끼리의 균형 때문에 연탄 값을 더 이상 올릴 여지가 없어져 정부는 올해도 석탄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주면서 더 깊게 물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되었다.
원화 절상 분을 끌어다 쓴 전력요금인하는 그만큼 한전의 외채상환여력을 깎아먹는 것이므로 공공부문의 외채부터 앞당겨 갚는다는 흑자관리대책의 기본줄기와 어긋나는 것이다.
특소세인하는 그 방향은 옳지만 전반적인 세제개편 없이 물가우선에 밀려 임시로 취해지는 바람에 연간 1천5백억∼2천억 원의 세수감소를 피할 수가 없게되었다.
그만큼 재정의 통화환수여지는 줄어들면서 팽창편성이 불가피한 내년예산의 재원마련도 문제가 되고, 제조업가동률이 89%에 이르는 호황의 꼭대기에서 도리어 소비재가격이 내려가는 어긋난 타이밍을 잡는 골이 됐다.
또 물가가 급해지면 매번 들고 나오는 공공요금의 동결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는데 이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어 두는 악수일 뿐이다.
지난해 버스요금의 대폭인상이나 지하철로 인한 막대한 재정적자에서 보듯, 언젠가는 요금을 한꺼번에 대폭 올리든가 정부가 더욱 깊게 물려 들든가 하는 방법밖에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물리적인 가격통제의 발상도 여전하다.
개인서비스요금의 인상을 5%이내에서「억제」하겠다는 것이나, 올해도 다시 시장 지배적 사업자와 품목에 대해 가격·수급동향을「점검」하겠다는 것은 말이 억제나 점검이지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정부가 직접 가격을 틀어쥐고 있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따지고 보면 상황이야 어떻든 올해 소비자 물가상승률을 5% 이내에서 억제하겠다는 정책목표부터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물가란 그때 그때의 경제상황에 따라 나타나는「결과치」이지 사전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정책변수」가 아니다.
물가관리를 위해 정부가 꾸준히 해야할 일은 위와 같은 목표관리 식의 응급조치들이 아니라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 수범을 보이고 평소에 통화량을 적절히 조절하며 경쟁을 촉진하는 가운데 가격담합행위 등 불공정거래를 감시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해 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해외부문에서 터져 나오는 통화 거두어들이기를 효과적으로 하지 않고 선거정국을 너무 의식, 떨어지려는 주가를 안간힘을 쓰며 떠받쳤으며 몇 년이 걸릴지 얼마가 들지도 모를 개발공약을 남발해 부동산까지 들쑤셔놓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올해의 물가 오름세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연간 5%이내라는「틀」속에 억지로 물가를 잡아넣으려니 물가정책다운 원론에서는 또 한번 멀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앞으로 국민들이 지켜보아야 할 것은 위와 같은 응급조치들의 효과가 아니라 정부가 이번 대책을 통해 뒤늦게나마 약속한대로 과연 고통스런 재정·금융긴축을 얼마나 꾸준히 밀고 나갈 것인가 하는 대목이다.
당장 총선과 추갱예산 편성이라는 두 차례의 큰 고비가 눈앞에 닥쳐있느니 만큼 물가안정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과연 확실하다면 유가를 내리고 가격을 통제하는 것만으로 물가는 안심할 수 있다고 강변할 것이 아니라 지난 대통령 선거 때와 같은 전철을 다시 밟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해 보여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정부가 하는 일과 약속에 대해 국민이 전폭적으로 믿고 따라갈 수 있는 풍토의 조성이 앞서야한다는 얘기다. <김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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