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강도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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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칼에 잘린 머리칼 한움큼을 입에 문 주부가 파랗게 질려 시키는대로 따라 왼다.
『선량한 강도님.』
『기어!』 살기띤 명령에 양손을 뒤로 묶이고 재갈을 물린 80대 할머니는 마루바닥을 올챙이처럼 포복했다.
『우리는 선량한 강도님들야. 알아모셔야지….』 금품을 챙긴 정장차림의 30대「3인조」는 훔친 승용차를 타고 유유히 아파트를 떠난다-.
19일 오후4시 서울시경 형사과 도범계 사무실.
최근 서울과 수도권지역 대낮 고급아파트에서 20여차례 강도짓을 한 3인조중 2명이 붙잡혀와 뻔뻔스럽고 무지막지한 강도현장을 진술하고 있다.
책상 위엔 날이 퍼런 생선회칼·단검 11자루, 등산용 도끼 1개, 쇠톱을 갈아 만든 만능 자동차 키 5개 등 압수된 각종 범죄용구 40여점.
『저것들을 갖고 다니며 넉달동안 1억6천만원어치를 털어왔어요.』
『훔친 차 3대의 번호판 숫자를 교묘히 고쳐 수배를 피하고 장물 처분땐 정교히 변조한 훔친 주민등록증을 제시,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죠.』
둘다 「특강」전과 5범 감방동기생인 이들을 『강도전과자들이 고급차를 타고 돈을 물쓰듯 한다』는 제보를 받은 경찰이 2개월의 미행 끝에 장물처분현장을 덮쳐 간신히 붙잡았다.
머리칼을 생선회칼로 잘라 입에 물려 『선량한 강도님』을 복창시키고, 할머니에게 포복을 강요하며 피해자들을 농락한 인두겁을 쓴 범인들은 억대의 노획물을 강남유흥가에 활개치며 뿌려댔다.
『범행수법은 날로 지능화·흉포화해 황새걸음으로 달리는데 뒤쫓는 수사력은 참새걸음이니….』
두달 고생 끝에 3인조중 2명을 겨우 붙잡은 수사간부의 푸념이 실감나게 전해져왔다.

<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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