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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승일의 시시각각

사이버 국방은 적폐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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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사이버 국방’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계기는 암호학 전문가인 임종인 고려대 교수의 짧은 브리핑이었다. 2015년 1월, 30분짜리 국방부 청와대 업무보고 중에 3분을 할애받은 그는 “사이버 공간은 육·해·공에 이은 제4의 영토다. 이를 수호하는 것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한다”고 설득했다. 특히 “선친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에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세워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듯이 (따님은) 사이버 자주국방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박 대통령은 며칠 뒤 임 교수를 청와대 안보특보(장관급)로 전격 발탁한 뒤 그의 조언대로 사이버 안보 비서관 직제를 신설했다.

댓글 파문, 최정예 장교 양성기관에 불똥 #가상영토 수호 위해 사이버사령부 키워야

보수정권 청와대 정무직 1년 근무가 족쇄가 됐을까. 그가 주도해 만든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가 근래 집권 세력에게 두드려 맞고 있다. 국군사이버사령부 댓글 공작과의 연관설이다.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여론조작이 본격화한 2012년과 사이버국방학과가 개설된 시점이 비슷하다” “댓글조작을 주문한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이 이 학과를 만드는 데 열심이었다” 같은 의혹을 제기한다. 여기에 억측까지 가세하자 젊은 학생들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 번 배출된 졸업생 총 60명이 사이버사령부 댓글 부대에서 일했다는 보도가 일례인데 학생회가 나서 항의하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미래 사이버전을 이끌 장교 사관학교가 댓글 부대원 양성소로 격하되는 데 대한 낭패와 분노였다. 실제로 졸업생들은 군부대가 아니라 ADD에서 사이버 무기 연구·개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불과 5년 된 신생 사이버국방학과는 엘리트의 산실로 입소문을 탔다. 상위 0.5% ‘공신’이 몰리는 명문 학과다. 입학 정원 30명 거의 전원이 서울대와 의과대·경찰대 중 한 군데 이상 동시 합격한 수재다. 서울대 이공대의 어느 학과보다 수능 커트라인이 높을 정도다. 안정된 의사의 꿈을 접고 청춘기를 의무복무 7년 국가안보에 일조해 보겠다고 몰려든 최정예 보안요원들이다. 학과 서클 ‘사이코(CyKor)’는 국제 해킹 올림피아드 단골 우승팀이다. 대한민국의 사이버 영토를 지키고 넓히는 데 필수적인 동량들이다.

사이버 전쟁이 국가 명운을 좌우하게 된 건 상식에 속한다. 북유럽 소국 에스토니아는 2007년 인접국의 사이버 공격을 받아 은행·관청·언론사·발전소 등 국가 전체가 마비됐다. 원전이 핵 공격보다 사이버 공격을 더 무서워할 정도다. 2006~2010년 이란 원전이 이스라엘의 스턱스넷이라는 사이버 공격을 받고 멈춰선 일이 그것이다. 해킹은 이제 정보 빼가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 기간시설과 미사일 같은 첨단무기에 침투해 기능을 무력화하는 데 쓰인다.

댓글 여론조작을 지시한 혐의로 김관진 전 국방장관이 구속됐다. 검찰은 2010년 사이버사령부를 만든 MB에게까지 칼끝을 겨눈다. 그렇다고 “사이버사령부를 차라리 없애라”는 여권의 주문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사이버 전쟁 수행 능력은 미국·중국·러시아·이스라엘 4강은 물론 북한에도 한참 뒤진다”(임종인 교수)는 평가에 전문가들은 공감한다. 미 뉴욕타임스는 최근 ‘북한이 20여 년간 정예 해커 7000명을 양성해 세계 7대 사이버전 강국 반열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유엔은 제3차 세계대전이 나면 핵전쟁이 아니라 사이버전쟁부터일 거라고 한다.

우리 국군에 사이버 병과는커녕 주특기조차 없다. 사이버사령부 인원 600여 명은 북한의 ‘해커 전사’ 숫자의 10분의 1도 안 된다. 김정은은 이도 모자란다고 “1만 명으로 늘리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챙긴 사이버 국방이라고 적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홍승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