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극단의 인물 둘 다 충신 만드는 데 400년 걸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남한산성 다룬 두 사람 솔직토크

“극단에 있는 두 인물을 둘 다 충신으로 평가하는 데 400년이 걸렸다.”(김훈) “누구의 말이 옳다고 얘기하는 대신 풍경·인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세밀히 표현하고 싶었다.”(황동혁)

김훈 작가 #주자학 도그마에 빠져 시대 못 읽어 #지금도 그런 관념에 빠진 사람 많아 #황동혁 감독 #한 명에 몰입 않고 중간에 선 영화 #관객들, 낯선 공간에 있는 느낌일 것

1636년 남한산성에서 일어난 사대부들의 대립을 보는 소설가와 영화감독의 시선이다. 소설 『남한산성』(2007), 같은 제목으로 이달 3일 개봉한 영화는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와 맞서 싸우자는 척화파(김상헌), 순간의 치욕을 견뎌 다툼을 피하자는 주화파(최명길) 중 어떤 편도 들지 않는다. 둘 모두 사사로운 감정 대신 나라와 백성을 우선으로 두고 팽팽히 맞서는 인물로 그린다. 11일 만난 작가와 감독은 한 주장만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읽는 감각이 필요하다는 데에 뜻을 같이 했다.

소설과 영화 ‘남한산성’에서 패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황동혁 감독(왼쪽)과 김훈 작가. [사진 라희찬(STUDIO 706)]

소설과 영화 ‘남한산성’에서 패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황동혁 감독(왼쪽)과 김훈 작가. [사진 라희찬(STUDIO 706)]

관객수가 300만을 넘었다.
김훈(이하 김)=나는 영화를 잘 안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근 영화의 흐름은 알고 있다. 특히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는 관객을 (한쪽으로) 몰아넣는다. 이념의 프레임에 갇혀있다. 선과 악, 좌와 우의 대결이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그런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다. 극단에 있는 두 인물을 둘 다 충신으로 만들어놨다. 그렇게 하는 데 4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한쪽이 무너져야 한쪽이 살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다운 시선이 들어있다.

황동혁(이하 황)=보통 영화는 관객을 한 인물에 몰입시키고 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누구의 말이 옳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묘사와 스케치를 하고 싶었다. 지금 관객들은 그게 새로워서 열광하거나 그게 낯설어서 싫어하는 것 같다. 한 명에게 몰입하고 싶은데 중간 지점에 서 있게 하니까 관객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낯선 공간에 서 있는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한다.

정확한 프레임이 없어 상업적으로는 위험할 수 있다.
=내 소설이 많이 읽히리라 꿈에도 생각 안 했다. 영화도 상업적으로 대박나려면 프레임을 모두 김상헌에게 대면 됐다. 자존심, 민족의 영광으로 틀을 잡으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객이 왔을 것이다. 우리는 그게 우리의 영광이라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인조의 투항은 영광이 아니다. 치욕이다. 선도 악도 아니고 삶의 길이다. 임금은 그 길 밖에 없고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자를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독자들이 많이 따라왔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감독이 되기 전부터 내 가슴을 뛰게 했던 할리우드의 클래식 영화 같이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이 소설을 읽는 순간 들었다.

한 쪽을 옳다하는 것을 뛰어넘는 시각이 영화에서 보인다.
=조선은 성리학의 세계였고 시대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대한 감각이 정확해야 된다. 그들은 주자학의 도그마에 빠져 그걸 못 봤다. 명과 청의 대립을 힘과 힘,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 봤다. 현실이 안 보이는 것이다. 관념의 무서움이다. 지금도 그런 관념에 빠져있는사람이 많다. 프레임에만 빠져서는 존망의 기로를 돌파하기가 어렵다. 전환을 해야 한다. 어떤 문제가 오는가 내다 보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소설의 세계는 영화로 어떻게 옮겼나.
=제일 어려운 건 대사였다. 소설 속 대사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게 많지만 내가 만들어낸 대사도 그것과 같은 품격을 가져야 했고, 최소한 비슷하게 보여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다.

=조선 사대부의 언어를 영화로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인간의 표정과 말이 같이 나오기 때문에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소설가의 문체를 그대로 따라올 수는 없지만 카메라로 보여줄 수는 있다. 나도 글을 쓸 때 바싹 사물에 들이닥칠 때가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높이도 있다. 내려다보거나 평행으로 본다. 글 속에 영상이 들어있다. 감독이 그걸 카메라로 했더라. 당기거나 멀어지고 내려다보는, 글 쓸 때의 전략을 감독이 했다. 특히 영화 첫 장면의 살인에서 폭력적인 것을 최대한 제거하면서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 것이 내가 글을 쓸 때 가졌던 시각과 일치했다.

새로운만큼 낯설고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패배와 치욕에 관한 일이다. 이걸 가지고 이해를 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훈련이 안 돼 있다. 하지만 강대국 틈바귀에서 시달리는 현실의 운명이 다가온다. 하지만 이 정도 이해를 받은 것은 성공이고 충분하다.

=어느 하나가 제대로 풀려가지 않는 게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고, 민족의 가장 비참한 순간을 다룬 이야기라 깊은 인상을 받거나 혹은 낯설어 하는 상반된 반응이 보인다. 이렇게까지 나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두 그룹이 어떻게 스미고 만나게 될지가 가장 궁금하다. 

김호정·장성란 기자 wisehj@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