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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JERIReport

전면 손질 시급한 공정거래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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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따라서 외국 경쟁법에는 없는 한국 특유의 이 같은 재벌 규제가 공정거래정책에 대한 관심과 논의를 지배하고 있다. 지금도 재벌의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출자총액제한제 등 각종 재벌 규제가 필요한지 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법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재벌정책이 아니라 공정거래법이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고 있으며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재벌 규제가 어떻게 시행되어 왔는지, 재벌 기업들에 대한 법 집행은 어떠했는지, 공정위가 법 목적에 이바지할 문제들을 제대로 다뤄 왔는지, 공정거래 사건은 올바로 처리하고 있는지 등이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 그런데도 공정위는 이 같은 본질적 이슈들에 대해선 소홀히 다뤄 온 것으로 생각된다.

대기업집단 규제만 해도 그렇다. 이 제도는 원래 재벌이 가공자본을 조성함으로써 계열 확장을 막는 수단으로 도입됐다. 그러나 정부는 10여 년 전부터 업종전문화.재무구조 개선.소유 분산.지배구조 개선 등 다른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규제를 활용했다. 10여 년간 공정거래법이 무려 아홉 번이나 개정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도 '조변석개'라 규제를 받는 기업집단과 계열사들이 크게 달라졌다.

이 중에서도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가장 많이 변했다. 총액한도액이 수시로 달라졌고, 예외와 적용 제외를 받는 항목도 계속 늘어나 예외.적용 제외 출자가 출자총액의 50~60%대에 이르고 있다. 자연히 이 제도는 실효성을 갖기가 어렵게 됐다. 경쟁 당국의 재량권이 확대됐으며, 규제 과정은 정치화됐고, 기업의 불확실성은 고조됐다.

또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규제의 명분으로 재벌의 과도한 확장 방지를 내걸었지만 정작 재벌의 확장 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안 댔다.

1981~2004년간 대기업집단에 의한 비계열회사의 결합은 1600건 이상이지만 공정위가 규제한 것은 단 한 건뿐이다. 같은 기간 공정위가 심사한 기업 결합은 8000여 건인데 이 중 단 5건만이 금지됐다. 그나마 금지된 것은 대부분 중소기업 간 결합이었고, 대기업의 결합 행위는 경쟁을 크게 저해하는 것인데도 국제경쟁력 강화 등의 이유로 모두 허용됐다.

대기업들의 시장지배력 남용에 대해서도 공정거래법은 거의 작동하지 못했다. 같은 기간 중 공정위가 시정조치를 내린 것은 4000여 건이었는데 이 중 시장지배력 남용 부분은 단 27건에 불과했다. 게다가 대기업의 시장 독점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경우도 없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 대규모 시장은 독점화됐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일반 집중)은 높아졌다. 이처럼 공정거래정책은 명분과 실상이 서로 따로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정책을 전면적으로 개편.혁신해 이 괴리를 없애지 않는 한 정책의 실효성은 확보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

더욱이 국내외 환경도 재벌 규제가 도입(86년)된 20년 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법 제도도 변했고, 시장 상황과 정부의 역할도 달라졌다. 글로벌 경제가 도래해 기업 활동은 세계화됐다. 소프트웨어 등 지식기반 신경제산업들이 부상하고 있으며, 경쟁법을 국제적으로 집행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새로운 환경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공정거래정책은 획기적으로 혁신돼야 한다.

우선 대기업집단 규제는 재벌을 국내 시각으로 본 '국내용 정책'이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에서 이 같은 국내용 정책은 논거와 효력을 이미 상실했다. 기업들이 무대를 세계로 넓히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실효성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기업의 의사 결정만 왜곡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대기업집단 규제는 폐지돼야 한다.

대신 공정위는 효율성이 높은 기업들이 성공하는 시장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대기업들의 경쟁 제한적 기업 결합과 지배력 남용에 대해선 법을 엄하게 집행해야 한다. 대기업이 부당하게 시장지배력을 형성.강화하는 것과 계열 확장을 막아야 한다. 선진국들의 경험에서 보듯이 대기업 문제는 경쟁법을 엄하게 집행하기만 해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 공정거래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바로 이것이다. 권장해야 할 정직한 경쟁 행위를 당국이 앞장서 금지.처벌하고, 응당 막아야 할 경쟁 제한 행위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국부와 국민 후생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정거래당국의 법 집행 역량과 수준이 매우 중요하다. 당국이 전문적인 조사.분석 능력을 갖고 있어야 경쟁 저해 행위를 제대로 찾아낼 수 있고, 위법성도 올바르게 심판할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의 경쟁당국이 경제 분석 전담 조직을 두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도 속히 이런 조직을 둬야 한다. 그래야 공정거래당국의 역량과 전문성이 확충되고, 법 집행의 품질과 성과를 끌어올릴 수 있다.

또 현재 공정거래법은 공정위에 의해서만 집행될 수 있다. 그래서 경쟁당국이 경쟁 제한 행위를 방치할 경우 피해자는 법에 호소할 방안이 없다. 따라서 선진국들처럼 피해자가 공정위를 거치지 않고도 법원에 소송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사소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집단소송제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해 피해자들이 법을 어긴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야 한다.

신광식 김&장 법률사무소 상임고문·전 한국개발연구원 법경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