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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유엔 사무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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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계 최고의 공복(公僕)을 뽑는 일은 이변의 연속이었다. 1953년 3월 3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다그 함마르셸드 스웨덴 외무차관을 2대 사무총장 후보로 정해 총회에 추천했다. 총회는 통과의례다. 하지만 당사자는 까맣게 몰랐다. 다음날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만우절 농담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국제무대에서 무명에 가까웠다. 36세 때 중앙은행 총재를 맡아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쪽에서만 이름이 알려졌을 뿐이다.

당시 캐나다.인도 등 4개국에서 사무총장 도전장을 냈지만 안보리의 벽을 넘지 못했다. 미.소의 엇박자 투표 때문이었다. 함마르셸드는 영국과 프랑스가 낸 타협 카드였다. 그를 일약 유엔 수장으로 만든 것은 동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을 중립적 인사라는 안보리의 공감대였다. 그러나 그는 57년 연임 이후 편파 시비에 휘말렸다. 소련은 사직 권고안을 냈다. 면직까지 요구했다. 친서방이라는 이유였다.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중립적인 국가는 있지만 중립적인 인사는 없다"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1인 사무총장을 동서 진영과 제3세계 대표로 구성되는 트로이카 체제로 바꾸자고 했다. ('국제연합', 아카시 야스시)

1981년 9월. 안보리는 다시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미.중 대립이 그 불씨였다. 당시 사무총장 후보는 3선에 나선 쿠르트 발트하임(4대 총장)과 탄자니아의 살림 외무장관으로 압축됐다. 살림은 아프리카 단일 후보. 미국은 발트하임을, 비동맹권의 맏형 격인 중국은 살림을 밀었다. 투표에 들어가면서 미.중은 서로 몽니를 부렸다. 미국은 살림에 15차례, 중국은 발트하임에 16차례나 거부권(veto)을 행사했다. 상임이사국(P5)만이 갖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마구 휘두른 셈이다. 두 후보가 5년 임기를 절반씩 나눠갖는 타협안도 소용없었다. 페루의 페레스 데 케야르 외무차관(5대 총장)이 급부상한 것은 이 와중이었다.

이번엔 소련이 망설였다. 페루가 미국의 뒷마당이란 인식에서였다. 결국 소련은 그가 주소련 대사를 지낸 경력을 감안해 기권하고 말았다. 유엔사에 남을 접전이요, 어부지리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출사표를 던졌다. 미얀마의 우탄트 3대 총장 당선 이래 35년 만에 아시아 출신 대망론이 일고 있을 때다. 호기다. 그러나 한국을 놓고 이해가 얽히고설킨 P5의 관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 그는 흐루시초프의 말을 뒤집어야 할지 모른다. "중립적인 국가는 없지만 중립적인 인사는 있다"고.

오영환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