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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수 둘 때 판이 더 잘 보인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6호 30면

일상 프리즘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가 외출복이다. 최근에 새로 산 옷도 셔츠 등 캐주얼인 것을 보면 자유인으로서 틀이 잡혀 가는 것 같다. 어쩌다 넥타이를 매고 약속 장소에 가면 답답해서 빨리 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내게 지난해 말부터 바이오·가전 등 다양한 분야의 국내 중소기업에서 경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예전처럼 전력투구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엔 영국의 다국적 컨설팅회사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번엔 솔깃했다. 한국에 사무실이 없으니 출근할 필요도 없었고, 날짜를 조율한 뒤 전화로 상담만 하면 됐다. 무엇보다 전에 근무했던 회사의 경영 비밀은 공개하지 않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 흔쾌히 승낙하고 나니 어떻게 나를 알고 연락을 했는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언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한국 관련 정보를 지속적으로 취합했다가 필자가 10년 넘게 밀레코리아를 경영하다 퇴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e메일로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이후 한국시장에 진출하길 원하는 해외 가전업체를 자문하는 일을 맡았다. 한국 기업이 제품을 수출하려면 해외 시장에 대한 기본 정보가 필요하듯이 해외 기업도 충분한 시장조사를 거쳐 한국 시장을 두드린다. 특히 해외 가전업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삼성과 LG가 있기 때문에 한국 진출을 두고 다각도로 주판알을 튕길 수밖에 없다.

해외 가전업체는 공통적으로 유통 방식과 가격 구조에 관심이 많았다. 백화점이나 대리점 등 전통적인 유통 경로를 이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국내 TV홈쇼핑 시장을 주목했다. 홈쇼핑은 창고에 제품을 쌓아뒀다가 바로 고객에게 배송하기 때문에 유통 과정을 줄일 수 있고, 홈쇼핑 방송을 통해 제품을 홍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서다. 과거 필자도 독일의 프리미엄 가전인 밀레를 한국 시장에 유통하는 방식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때 선택한 게 인터넷 마케팅이었다. 초기엔 명품을 인터넷으로 판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인터넷 쇼핑몰 게시판에 사용해본 고객들의 댓글이 쌓이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판매가 급격히 늘었다.

상담을 해 보니 유럽계 가전업체들은 자사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컸다. 한국 시장에 대한 정확한 분석보다 자사의 기술력과 제품에 대한 확신만으로 수출 전략을 짰다. 독일 속담에 ‘다른 엄마도 예쁜 딸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소속된 회사의 제품도 좋지만 다른 회사 제품도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특히 상당수 기업이 놓치는 게 애프터서비스(AS)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제품이라도 제대로 수리를 받을 수 없다면 중·장기적으로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판매만 신경쓸 뿐 서비스에 대한 준비가 없는 기업이 많았다. 사실 밀레가 인터넷 판매로 입소문이 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체계적인 사후 서비스였다. 수입 가전업체 중 유일하게 직영 수리기사를 운영하고, 제품 단종 후에도 20년 이상 부품을 보유하기 때문에 고객들이 믿고 제품을 구입했던 것이다.

기업을 경영할 때는 시간에 쫓겨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야 잘 보이는 듯 하다. 바둑 두는 사람 옆에서 훈수 둘 때가 판이 가장 잘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안규문
전 밀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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