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는…] 경쟁력 잃은 지역특화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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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대구의 특화산업은 섬유산업이다. 엄밀히 말하면 화학섬유직물제조업과 이에 따른 염색가공업이다. 단일업종이 지역 제조업 생산.고용 등에 차지하는 비중이 30%를 넘는다.

대구섬유산업을 이야기하려면 지역특화산업 육성정책의 효시인 밀라노 프로젝트를 빼놓을 수 없다. 대구시는 DJ정부 출범과 동시에 시작해 올 연말에 종료되는 밀라노 프로젝트에 이어 2단계로 포스트 밀라노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정부와 협의 중에 있다.

그런데 밀라노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섬유관련 기업들은 문을 닫고, 수출비중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밀라노 프로젝트야말로 정부의 지역특화산업 육성정책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대구.경북지역 섬유제품은 선진국 시장에서 우리의 10분의1 임금으로 저가 물량공세를 펼치는 중국에 밀려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지역 섬유업체 60% 이상이 단순 임가공 또는 하청업체로 유행과 기호에 따라 급속히 분화돼 가는 소비시장 요구에 걸맞은 제품을 기획.판매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제품개발과 공정개발을 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취약하다. 게다가 제사.제직.염색가공.패션디자인.봉제.판매유통업 등 업종간 유기적 협력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밀라노 프로젝트의 추진과정을 보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엿보기 어렵다. 연구개발 시설투자도 총량계획으로 추진돼 일부 파일럿 시설들은 과도하고 부적합한 시설임을 알면서도 사업이 집행됐다.

그 결과 일부 시설을 놀리고 있다. 연구개발 과제도 시장요구에 부응하지 못했고 연구개발 과제의 선정과 결과 평가, 연구개발 결과물에 대한 관리 등도 부실했다.

결과적으로 판매.생산기획.생산.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사업주체들 간의 협력체제 구축도 이뤄지지 못했다. 밀라노 프로젝트사업은 기업을 외면하고 섬유개발연구원.염색기술연구원 등 관련 연구소들이 횡적인 협력을 소홀히 한 채 제각각 추진해 온 것이다.

1980년대 말 동남아시아의 저가품 공세로 위기를 겪은 이탈리아 섬유산업의 위기극복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탈리아 북부, 유럽 남부의 대표적인 섬유단지인 모데나군(郡) 카르피시(市) 중소기업들은 정부 지원 아래 독창적인 디자인 능력을 제조업에 접목시키는 '고부가 다품종 소량생산'방식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이 지역 내 6만명의 근로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을 무기로 연간 83억유로(약 11조원)를 벌어들인다고 한다.

4백8개 중소기업이 한 해 동안 쏟아내는 독자 디자인만 12만개에 가깝다. 워낙 일감이 많아 이곳의 실업률은 2.5%로 이탈리아 평균(10.6%)을 훨씬 밑돌고 있다. '카르피시 모델'은 이탈리아가 91년 '2만달러 국가'에 진입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탈리아의 사례에서 본 '고부가 다품종 소량생산체제'의 구축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를 위해선 해외시장과 연계된 부가가치물류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분화되고 급변하는 해외시장의 틈새를 공략할 수 있도록 생산공정 개선, 기술 개발, 제품기획 능력 제고, 인력 양성, 마케팅, 브랜드 이미지 개발 등을 위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지역특화산업 육성정책은 더 이상 집 짓고, 설비를 도입하는 총량계획으로 추진해서는 안된다. 주변여건의 변동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시계획(Indicative plan)으로 추진해야 한다.

특히 신속대응형 유연생산 체제를 위해 업종간 협력네트워크와 함께 연구개발 평가.관리 시스템 구축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밀라노 프로젝트야말로 지역특화산업 육성에 있어 확실한 발전목표 설정과 함께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정 인 대구경북개발연구원 지역계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