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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남자의 책 이야기] 표정훈 출판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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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책과 빛의 관계는 불가분이다. 점자 도서나 오디오북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빛이 있어야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관계란 은유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책이 삶의 길을 밝혀주는 빛이 될 수도 있다. 그 빛은 진리일 수도 감동일 수도 어떤 깨달음일 수도 있다. 모티머 애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은 빛이다. 다만 그 빛의 밝기는 읽는 사람이 발견하는 만큼 밝아진다. 독자에 따라서 그것은 빛나는 태양일 수도, 암흑일 수도 있다.'

매천 황현(1855~1910)의 '절명시'(絶命詩)에 나오는 등불은 비장하고 처절하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을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이란 참으로 어렵구나.' 황현은 이 시를 남긴 뒤 더덕술에 아편덩이를 타서 마시고 절명하고 말았다. 황현이 1910년 8월 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한 달 뒤 전해듣고 나서의 일이다.

황현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문재가 남달랐던 아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집에 천 권의 책을 비치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렇게 각별한 배려 속에 황현은 당대 최고 수준의 학식을 쌓았지만, 나라의 운명은 그로 하여금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게 만들었다. 풍전등화가 아니라 아예 꺼져버린 나라의 운명을 접한 황현이 가을 등불 아래 느꼈을 비감의 깊이에 새삼 옷깃을 여며본다.

책을 읽기 위한 빛이 왕성한 지식욕을 나타내주는 경우도 있다.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10대 초반에 공부 시간을 제한 받았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손자 러셀이 과로할까봐 걱정한 할머니의 조치였다. 그러나 러셀은 침실에서 촛불을 하나만 켜고 남몰래 공부했다. 러셀은 추운 밤에 잠옷 바람으로 책상에 앉아 공부하다가 조금이라도 인기척이 들리면 촛불을 끄고 침대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고 회고한다.

가을이 되면 자주 회자되는 말로 등화가친(燈火可親)이 있다. 가을이 등잔불을 가까이 하여 책 읽기 좋은 계절임을 뜻하는 말로, 중국 당나라 시대 대문장가 한유가 아들의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 쓴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에 나온다. '때는 가을이라 장마도 개고, 마을과 들에는 서늘한 바람불어, 등잔불도 가까이 할 수 있으니, 책 펴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에 도서 판매량이 바닥을 치는 경우가 많다. 수험생들 입장에서는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 할 긴박한 시기다. 맑은 날씨에 적당한 기온은 사람들을 자꾸만 야외로 이끈다. 여름 휴가철 해운대, 경포대에 몰렸던 인파가 단풍을 즐기기 위해 내장산, 설악산으로 몰린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을은 책 읽고 앉아있기에 아까운 계절이다. 밤늦게까지 휘황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요즘이지만, 문자의 미로를 밝혀줄 등불 하나의 소중함은 오간 데 없어져 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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