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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유쾌하게 비틀어 속내를 들춰내는 한재림표 우화

중앙일보

입력

‘더 킹’(1월 18일 개봉)이 개봉 12일째인 1월 29일까지 관객 383만 명을 모았다. 총제작비 130억원이 투입된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로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 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1980년대 초부터 2009년까지 한국의 현대사를 훑으며 줄곧 유쾌한 분위기로 흐른다. 화려한 영상도 눈길을 끈다. 결말에서는 과감하게도 관객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다. 한재림(41) 감독이 빚어낸 또 하나의 야심작이다. ‘더 킹’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한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짚어 봤다.

‘연애의 목적’부터 ‘더 킹’까지

[ 장르 비틀기 ]
더 킹

더 킹

‘더 킹’은 ‘연애의 목적’(2005) ‘우아한 세계’(2007) ‘관상’(2013)에 이은, 한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이다. 그의 영화를 꿰뚫는 키워드는 ‘비틀기’다. 한 감독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풍자’다. “‘연애의 목적’은, 남녀 주인공이 고급 식당에서 데이트하는 말랑말랑한 멜로영화의 관습을 풍자한 작품이다.” ‘연애의 목적’의 유림(박해일)과 홍(강혜정)은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에서 뻔뻔하게 야한 말을 주고받으며 연애의 치졸한 속내를 드러낸다. 장르 비틀기는 ‘우아한 세계’로 이어진다.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한 누아르영화라 하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들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우아한 세계’는 다르다. “조폭인 주인공 강인구(송강호)는 낮에만 활동한다. 먹고사는 일과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액션도 편의점 같은 데서 한다.” 한 감독의 말이다. “누군가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네’라고 하는 이야기를 보고 ‘너무 빤하지 않나? 다 아는 얘기를 해서 뭐해?’ 하고 되물을 때가 많다. 적어도 내게 영화는 시간을 때우는 도구가 아니다. 영화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숨은 뜻을 파헤치는 게 즐겁다.”

[ 권력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

한 감독은 ‘더 킹’의 장르를 “블랙 코미디”라 정의한다. ‘베테랑’(2015, 류승완 감독)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 등 권력자들의 타락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기존의 한국영화들은, 권력의 피해자 혹은 피해자들의 대변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극 초반에 주인공이 권력의 악행에 피해를 입거나 그것을 목격하고, 후반 들어 주인공이 잘못된 권력자들을 벌주는 데서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자아냈다. ‘더 킹’은 반대다. “한국 사회의 권력자인 ‘정치 검사’를 주인공으로 그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존재인지 비틀어 보여 주고자 했다”는 것이 한 감독의 설명이다. 건달의 아들에서 정치 검사가 되는 박태수(조인성)의 일대기. 이 형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태수의 선택을 지켜보며 그 욕망을 직접 들여다보게 한다. 이 영화가 그렇게 발가벗기는 권력자들의 민낯이란 잔뜩 폼을 잡다 유행가에 맞춰 춤추고, 차기 대통령이 누구인지 맞추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선거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모습이다. 한 감독의 말대로 “그들이 힘을 유지하기 위해 끝판에 얼마나 치졸해지는지” 보여 준다. 주먹 쓰는 고등학생에서 검사가 되는 태수의 일대기는 일종의 우화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맞춰 극 전체에 태수의 내레이션을 깔았다.” 상징적인 영상을 적극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부장 검사 한강식(정우성)이 거물급 인사들을 필요에 따라 소환해 조사하고 구속하는 과정을, 스테이크를 요리하는 과정과 교차해 보여 주는 등의 영상 말이다. “태수가 결정적인 선택을 하는 장면에서 영상이 180도 돌아가거나, TV 화면 속 인물과 가상의 섹스를 나누는 것처럼 시각적 재미를 곳곳에 배치”했다.

‘더 킹’을 본 많은 사람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이하 ‘더 울프’)를 떠올린다. 월가 최고의 증권맨 조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욕망을 따라 질주하는 이야기다. 한 감독도 이 같은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다. “몇몇 인물의 일대기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세계를 풍자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영화 ‘더 울프’ ‘부기 나이트’(1997,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 웹 시리즈 ‘나르코스’(2015~, 넷플릭스) 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형식이 우화적인 이야기에 어울린다고 봤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고 강조한다. “‘더 울프’가 영화적 형식을 통해 주인공 조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더 킹’은 상대적으로 관객을 태수의 입장에 동화되도록 만든다.” 한 감독은 그것이 “극 후반 태수가 느끼는 뼈저린 후회를 관객이 제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 위한 장치”라 밝힌다. “권력자들이 어떤 욕망과 원리에서 그런 짓을 하는지, 정도를 벗어난 권력이 생각만큼 기세등등하고 멋진 것이 아님을 태수의 눈을 통해 관객이 이해하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 ‘더 킹’의 결말이 묻는 것 ]

‘더 킹’에는 전두환부터 이명박까지, 가까운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이 등장한다. 한 감독이 “내가 기억하는 한국 사회의 역사”, 그 얼굴들이라 부르는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이 영화가 태수가 권력의 실체를 깨닫는 결정적 순간과 연결 짓는 사건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다. 한 감독은 처음부터 “그 순간이 이 영화의 감정적 절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될 때 ‘권위의 시대가 끝나는구나’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기득권 세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한국 사회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정의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건 촌스러운 일이 돼 버렸다. 당시 나도 정치를 외면하고 ‘나 먹고사는 것이나 신경 쓰자’ 생각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접했을 때, ‘그분’에게 빚을 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우리에게 줬던 희망 같은 것에 대한 빚. 언젠가 그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재림 감독

한재림 감독

극 중 TV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태수는 권력의 비열함에 치를 떨며 지난 선택들을 후회한다. 여기서 영화는 태수가 걸어온 길을 되감아 그가 첫 선택을 했던 순간을 돌아보게 한다. 한 감독이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이 거대하고 복잡한 부조리가, 그 시작에는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상징한다.”

결말에 이르러 태수는 강식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영화는 그 복수의 성공 혹은 실패를 비추는 대신, 태수의 내레이션을 통해 “모든 건 당신의 선택”이라며, 그 결론을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그러한 결말을 선택하기까지, 한 감독은 고민이 많았다. “태수가 복수에 성공하는 결말도, 실패하는 결말도 써 봤다. 어느 쪽도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한 감독은 “복수의 성공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권력을 만들었는지 고민하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마지막 장면에서 태수가 관객에게 직접 그 물음을 던져야 했다.”

한 감독의 영화적 색깔, 그 방향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연애의 목적’(173만 명)과 ‘우아한 세계’(102만 명)가 내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풍자와 비틀기를 시도한 작품이었다면, ‘관상’은 그와 노선이 다르다.” 한 감독은 더 많은 대중과 만나자는 생각으로, 15세기 조선을 배경 삼아 최고의 관상가(송강호)가 거치는 삶의 풍랑을 전통적인 희비극의 분위기로 연출했다. 결과적으로 ‘관상’은 관객 913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반면 ‘더 킹’에서 한 감독은 자신이 좋아하는 풍자와 상징, 비틀기로 돌아왔다. 그는 “이 영화의 흥행 결과에 따라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더 킹’은 그에게 어떤 길을 열어 줄 것인가. 관객이 답할 차례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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