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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문학의 세계 두루섭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자신의 젊은 시절을 감동 없이 돌이켜보기도 힘들거니와 회한 없이 회상하기란 더욱 힘들 것이다. 그래서「감회」 랄 수밖에 없을 그 착잡한 느낌은 현실과 풍속, 환경과 의식, 생활과 꿈이 엄청나게, 거의 전폭적일 만큼 달라졌기 때문에 그만큼 더짙고 진솔해지지 않을수 없으리라.
하긴 생각해 보라. 검정색으로 물들인 군복에 목 위를 잘라낸 군화를 신고 한 두 권쯤의 책과 노트로 듣는둥 마는둥, 선생이 빼먹거나 우리가 빼먹기가 일쑤인 강의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면 우리는 어디로 갔던가. 학교앞 다방이나 당구장에서 노닥거리기도 했고, 다행히 돈이생기면 막걸리를 앞에 놓고 떠들었으며 제법 호가를 부리면 르네상스에서 음악을, 동도극장이나 평화극장에서『누구를 의하여 종은 울리나』 류의 재개봉영화를 듣고 보는 일밖에 더 있었던가. 모두가 을씨년스럽고 누구나 가난했기 때문에 삶이란 오히려 평화스러웠고, 혹은 그러기를 갈망했으며 유리잔속의 평화로움에서 이곳이 아닌 어느 다른 곳을 그리워했다. 적어도 졸업학년에 부닥친 4·19에 이르기 전까지 상아탑은 상아탑이었다.
그때 우리는 서구의 인문주의 세례를 받고 있었고 사회과학도였던 나는 다른 어문계 학생들처럼 유행을 따라 실존주의에 빠져들었고「카뮈」와「사르트르」 「도스토예프스키」 를 갓 역간되기 시작한 문고본과 전집으로 탐독했으며, 신이니 존재니 하는 거창한 주제로 밤거리를 헤매고 고민하기도 했고, 서정주의 시와 황순원의 소설을 보고 『사상계』 와『현대문학』으로 지성과 문학의 세계를 구경하기도 했으며, 제목만 보고 산 「칼·치비트」의 『역사의 의미』 서론에서「종말론」이라는 단어 하나를 발견하고는 흥분해 하기도 했고, 멀리서 보기만하던 여학생에게 부치지 못했거나 답장도 받지 못할 긴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텔리비전이나 프로야구가 있지도 않았고, 디스코테크나 스낵도 없었으며, 있다한들 대부분 가정교사로 숙식을 마련해야 했던 만큼 돈과 시간이 없었고 호기가 아닌 사치는 학점을 위한 공부와 더불어 비웃음 살 만한 것이었다.
출세란 우스운 것이고 취직이란 무망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이란 전후의 그것답게 실질적 한계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르트르」 처럼 책에서, 관념적인데서 자유로움을 얻어냈던 것 같았고, 그 사변적인 자유로움을 곧 젊음과 대학생의 특권으로 자부했던것 같다.
최루탄 가스도 없이, 비록 흘린 피는 많았지만 제적조처나 수배자 명단도 없이, 그리고 시민들이 목마른 시위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해주고 교수들의 동조시위를 얻어가며 벌인 두어차례의 데모로 완고한 통치자가 물러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 세대가 지난 이제 그 순진했고 비현실적이었던 분위기와 풍조들이 과연 얼마나 남겨져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그것들은 지금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인가.
실천적 이념과 물신주의적 체제속에서, 가난했기 때문에 비억압적이었으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던 50년대의 내면 풍경과 외부상황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효력을 가질 것인가.
그 시절의 순진함이 어떻게 해서 사회적 양식으로 통용될 수 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거대한 변혁의 계기로 마련될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의 역사적 현실감과 복잡한 실천적 분석논리를 그것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평가의 논리가 어떻든, 그러나 대학 시절을 괄호안에 묶어서 본다는 것은 이미 기성 세대 중에도 나이든층에 속한 나 같은 사람들만 에게가 아니라 지금 바로 그 시절의 가운데에 있는 20대, 그리고 이제 비로소 소년기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뛰어들 프레시맨들에게도 분명히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것은 이 대학 시절이 연령적으로 미성년기와 성년기의 사이에 끼는 「틈새」 이며, 의식상으로 보아 이론과 실천의 가능성이 중첩되는 「포갬」이며, 사회적 역할로보아 생산과 소비의 양쪽 모두를 뛰어넘는 「텅빔」이기 때문이다. 이 틈새-포갬-텅빔의 독특하고 기이한 위상은 보호와 독자성, 교육적 순응과 미답영역에의 개척, 창조적 소비와 무용한 생산이라는 무한한 잠재력과 선택을 보류한 가능성의 영토이며, 그것은 백지상태 (t-abula rasa)이기 때문에 끝없는 탐색과 도전이 열려진 지평이기도 하다. 대학생 시기가 이렇다는 것은 현실적 프로그램에 성급해지지 말 것을 권하는 동시에 실재적 가능성에의 관심을 유보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책을 통해서든, 대화에 의해서든, 혹은 관찰에 의해서든, 사색을 통해서든 자신을 자유롭고 순진한 것으로 괄호화시켜 자기의 가능성과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 대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삶이 아닐까. 30년 전을 감회로 떠올리면서 내게 소중했던 그삶이 의미있게 느껴지는 그 괄호로 묶기의 진실성이 한세대가 지난 이제의 젊은이들에게도 마찬차지의 미덕을 지닐 것이라는 소감은 그래서 얻어진 것이다. 김병익<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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