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소설민족생활사 백두산-제 1장 하늘과 대지(1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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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종자 여초 금당종> 황석영 그림 강행원
우리는 까마득한 옛적에는 한 부족이었다. 예와 맥은 서북의 황야를 지나 다른 사나운 부족들과 싸우면서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 실로 온갖 어려운 세월을 견디어 내었다. 큰한의 아래 자식들과 사촌들과 혈족들이 자신의 씨족을 거느리고 각각의 마을을 일으켜 열읍을 이루게 되었다 .예와 맥은 형제의 부족인 셈이었다. 어떤 씨족장은 싸움에 능하고 하호를 많이 거느리게 되어 대읍을 이루고 막대한 재물을 쌓게 되었으며, 또 어떤 씨족장은 다른 부족에 침탈을 당하여 마을 전체가 다른 이의 열읍에 병합되기도 하였다. 가계와 혈족의 구별에 따라서 예 맥의 부족은 갈라져서 각각의 대읍을 이루었다. 이제와서는 거의 다른 종족과 같이 여기게 되었으며 우리 예 부족은 다시 여러 열읍이 뜻하는 바가 같지 않고 서로 다투고 서로가 자기 읍의 이익을 가지고 다투는 판국이 되었다.
화백 모임에서 그런 차이를 의논해가면 되지 않습니까?
덕이는 달솔에게 물었다. 달솔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각 읍의 상호들은 모두 한의 혈족들이다. 처음에 다섯씨족장으로 나뉘어 오방의 열읍을 맡아 다스리기로 했을때는 별일이 없더니, 세월이 흐르면서 혈족들이 늘어나게 되고 상호들도 점차 분급받을 땅과 마을이 줄어들었으며, 게으르고 무능한 자들도 많았다. 또한 자네처럼 다른 부족 사람으로 자라나 하호에서부터 전공을 세워 일어난 이들도 많게 되니 자연히 혈족이 같다 하여 상호의 특권을 바라는 자들은 이제 거추장스럽게 되어버린 것이다. 화백 모임에서는 혈족 상호들의 보다 많은 이익과 특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나와 같은 몇몇 상호는 아무리 큰한의 협족이라 하더라도 부족에 공이 없거나 능력이 없으면 열읍과 마을을 나누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 맥은 옛날처럼 다시 한 부족으로 합쳐져야 한다.
예 맥뿐만 아니라 아홉 갈래로 나뉘어진 밝 종족이 하나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천호강 달솔은 덕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백장에게 그런 생각이 있는줄은 몰랐다. 이 드넓은 땅덩어리 곳곳에는 수많은 부족의 마을과 대처가 하늘의 별처럼 널려있다. 사실 나는 우리 부족의 영역도 모두 돌아보지 못하였거늘 어찌 다른 부족의 고장을 얘기할 수 있겠느냐. 우선 우리 부족 가운데서 상호들의 쏠데없는 힘을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는 화백 모임을 바꾼다.
호장의 사촌 형제인 달솔은 다른 천호장인 마가의 아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마가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직책과 열읍의 통치권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지만 그는 덕이가 목격했던대로 하호들에게 냉혹하였고 부족의 어떤 중요한 일에도 힘을 들인 적이 없었다. 마가의 아들은 열읍의 사제자인 박사와 한통속이었으며 읍의 모든 부와 권력은 그들의 것이었다. 천호강 달솔은 예가 안으로부터 여러가지의 변화를 겪고 있음을 잘 아는 유일한 상호였던 셈이다. 덕이는 조심스럽게 다른 부족의 백장으로서 중립적인 입장에 머물기로 마음 먹고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달솔에게 말했다.
저는 천호장님의 명에 따르고 이르시는대로 온 힘을 다해 받들겠읍니다.
그런 얘기나 듣자고 자네를 부른 것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대읍의 큰한의 할아버지와 친형제간이셨다. 지금 마가인 내사촌 형은 잘못하고 있어. 무능한 자기 친혈족들에게 다른 변방의 땅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게하지 않고, 지난번의 싸움에서 대읍으로부터 분급받은 마을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말았다. 나는 싸움에 직접 참가해서 피를 홀린 천호장들과 백장들의 불만을 알고 있다. 마가의 권한을 줄이고 그러려면 박사와 호장의 아들들을 제거해야만 하겠다.
덕이가 조심스럼게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먼저 천호장께서는 화백 모임에 참가하시는 다른 상호 어른들 가운데 뜻이 같은 분들을 찾아 보십시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호 출신의 백장 십장들과 하호 군사들에게서 인심을 얻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뒤에라면 박사를 먼저 제거하고나서 마가 호장과 그 친족들을 다른 변방 마을로 몰아내고 큰한에게는 그가 읍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려드리면될 것입니다. 저도 어른을 도와 드리겠읍니다.
그렇다. 너는 마가의 눈에 들게 되어 성내의 수비를 맡은 백장의 한 사람되었다. 박사를 없애는 일을 맡아주기 바란다.
분부대로 하겠읍니다. 하지만 그를 제거할 뚜렷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하호들은 그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알고 있으나, 몹시 두려워하고 있지요. 상호들의 가내노예들은 박사 때문에 자기 친족들이 순장을 당하고 제물이 되었음을 잘 알고 있지요 박사를 없애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 다음의 일은 천호장께서 직접 해내셔야하는 일입니다. 마가의 친족들을 사로잡고 마가를 쫓아내려면 다른 열읍들의 호장들이 묵인해야만 할것입니다. 그전에 제게 권한을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권한 말인가?
하호군의 습련 감관을 하도록해주심시오. 젊은 하호 전사들을 제 편으로 만들 자신이 있읍니다.
성내의 수비군 백장이 이 일에훨씬 유리할 것이다.
백장이라 하지만, 다른 네 명의 백장이 있고 그들은 마가 가솔들의 충복들입니다. 제가 하호전사들을 내 편으로 만들게 되면 성내의 수비군 오백과는 견줄수도 없는 큰 힘입니다.
달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덕이는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는 천호장의 모든 분부를 그대로 따르겠읍니다. 제가 모든 일을 잘 치러낸 다음에는 천호장께서는 제게 책임을 미루시면 됩니다. 저는 이 읍을 떠날 것입니다.
어디로 떠난단 말이냐?
동북방 동호의 땅으로 가렵니다. 그대신 제가 떠날적에 하호전사 천기를 제게 주십시오.
동호의 땅을 치겠는가?
거기서 몸을 일으켜 보렵니다. 그대신 제 힘이 자라나면 기필코 천호장님을 예의 큰한이 되시도록 힘껏 도와 드리겠읍니다.
천호장은 덕이의 당찬 말에 껄껄 웃었다. 그는 아직 덕이를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을 열어젖히고 진정으로 내대는 덕이의 말에 감복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약속하지. 그러나 이 일은 네 한 목숨 가지고는 당하지도 못할 큰 일이다. 그러면 언제가 좋겠는가?
덕이는 속으로 세월을 헤아려보면서 생각에 잠겼으며 천호장은 참지 못하고 먼저 말하였다.
봄이 오기 전에, 그러니까 부족의 화백 모임이 열리기 전이 어떠한가?
안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년 겨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만한 기간이면 어른께서는 삼천호 주변마을의 인심을 장악할 수가 있고, 좋은 기회를 노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좋다. 자네는 이 길로 돌아가자마자 성밖으로 나가 하호군사들의 습련을 맡아보게 될 것이다. 내가 노련한 백장을 천거해주겠다. 그는 우리의 먼 혈족으로 조상은 훌륭한 상호였으나 평민으로 몰락했던 자이다.
잘 알겠읍니다.
동절 사냥에 나갔던 달솔과 덕이는 이와같이 굳은 맹약을 나누게 되었다. 달솔과 같은 상호가각 부족 내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종종 하호들의 저항이 일어나기도 했고 어느 때는 참패한 하호들 수천을 예 부족의 연합군이 잡아두고 몰사 살육했던 적도 있었다. 여하튼 상호 계급이 혈족관계에 따라 늘어났고 분급이나 보상이 일률적으로 공평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며, 불필요한 호족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차츰 직계 혈연이 아닌 쪽에서는 불만이 커져간 것이 사실이었다. 하호들의 집단 노동으로 농산물과 수공물의 재부가 쌓이기는 하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재부를 관리하고 차지할 자들의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던 터였다.
덕이는 돌아오자마자 달솔의 제안으로 성 밖으로 습련 감관이 되어 나가게 되었다.
하호군을 같은 하호 출신의 백장이 조련시킨다면, 무엇 보다도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며 명령이 하달되기도 쉬울듯합니다. 백강 덕이는 아직소년 장수라 그와같은 연배의 소년전사들을 우리 부족의 오랜 관습에따라서 전위 선봉대로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읍니다.
하는 달솔 천호장의 진언은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졌다. 덕이가 성을 나간뒤에 달솔은 대읍의 화백 모임에 나갔다. 모임에 참가한 자들 모두가 큰한의 혈족들이었지만 열읍의 수장은 특히 큰한의 직계 혈족들이었다. 달솔은 되도록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천호장들과 무술 시합이나 벌이거나 술이나 마시면서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은근히 의사를 표시했다. 즉, 달솔의 의견은 각 열읍의 호장 가운데서 마가 우가 같은 다섯 큰들이 지명되고 이들이 나중에 돌아가면서 큰한의 자리를 물려 받게 되어 있으며, 열읍의 큰들은 자기 친척 가운데서 천호장의 분급을 내리며 상호 호족들을 이루게 되어 있으나, 이미 부족의 생활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미혈족 자체가 분파로 많이 생겨났고 능하고 무능한자가 있으니, 큰한은 스스로의 친계 가족 가운데 적장자를 골라 자기자리를 물려주는 대신에 다른 열읍들의 큰에 대하여는 한의 친계 가족이 아니라 그 통치 능력에 따라서 상호들 가운데서 뽑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읍 수장을 맡고있는 자가 다섯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는 더욱 늘어날 수도 있고 천호장이나 상호에 머물러 있는 다른 일반 상호들로부터는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의견이었다. 달솔은 다른 천호장들을 통하여 위와 같은 의견이 화백 모임의 공공연한 여론이 되도록 뒤에서 부추긴 셈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여른이었을뿐 정식의 의논거리는 되지 못하였다.
덕이는 달솔이 보내준 다른 백장검바우와 함께 하호 마을로 가서 십장들을 모으고 각 호마다 십육세에서 십팔세에 이르는 젊은이들을 추려내게 하고 그들 가운데 몸이 건강하고 날랜 청소년들로 따로 추려내어 삼백여명을 끌어 모았다.
덕이와 검바우는 이들 삼백인이 모두 십장과 같은 통솔능력읕 갖게 되도록 조련시킬 작정이었다. 다시 십장들 가운데서 싸움 경험이 있는 자들을 육십여인을 뽐아냈으니 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편제였던 셈이다.
덕이로서는 이들의 세배에 해당하는 군대가 필요했으나 여름철의 농한기에 농사를 짓는 하호들 가운데서 이를 충당해낼 생각이었다. 천호장 달솔의 묵인아래 이들 하호 청년 전사들은 일년내 농사에 동원되지 않았다. 덕이와 검바우는 이들을 이끌고 읍의 통치 구역에서 먼 곳에까지 나아가 습련하였으며 가을에는 발해 인근에까지 내려가 다른 부족의 마을을 정복하기도 하였다. 특히 해물과 소금의 유통을 뚫게 되었던 것은 천호장 달솔의 부와 부족 안에서의 권한을 늘려준 결과가 되었다.
덕이는 하호들의 집집마다 방문하고 노인들에게는 부모 대하듯 하였으며 데리고 있는 전사들은 친형제처럼 다정히 하였다. 달솔은 그를 때때로 성내로 불러들여 여러가지 의논도 하였고 덕이의 제안에 따라서 성내의 호족들과 다른 상호들의 인심을 얻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덕이는 따로 하호들을 통하여 큰의 친척들에게 속해있는 가내 노비들과 긴밀히 통하도록 애를 썼다. 드디어 추수철이 돌아왔을때 여느 해처럼 대 가을 굿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죄 지은 하호들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덕이는 가을철에 하호들의 불만이 가장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뼈 빠지는 노역에 의하여 풍요하게 거둔 곡식들은 모두 상호들에게 돌아갔고 그들의 동료나 자식들은 제물이 되어 죽어가거나 큰의 혈족들이 죽으면 가차없이 생매장을 당해야했던 때문이었다. 덕이는 다루를 통하여 성내의 하호들에게 박사가 반드시 살해되어야하고, 그가 없어지면 하호가 제물이 되는 일도 그치게 되고 대신에 다른 부족에서 포로를 잡아다가 치를 수가 있게 될 것이라고 소문을 냈던 것이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할때 대개 상호들은 사냥을 떠나게 되어 있었다. 이때에 달솔은 병을 핑계하고 집안 깊숙이 들어앉아 출타를 삼가고 있었다. 덕이는 백장 검바우와 더불어 은밀하게 그에게 찾아가 의논하였다.
큰의 장자 천호장 검불이 내일 사냥을 떠난다. 그는 아마도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달솔이 말하였고 덕이가 말했다.
좋은 기회입니다. 저는 척후를 보내어 그의 숙영지를 알아두겠습니다. 그리고 성내의 가내 노비들로 하여금 박사를 살해하도록 이르겠읍니다. 그때에 천호장께서는 성내 오백수비대의 전권을 장악하십시오. 저는 하호군을 끌고 검불의 숙영지룰 들이쳐서 그의 형제들을 모두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천호장께서는 휘하의 천여군사들과 성곽 수비군 오백으로 다른상호군들을 제압할수 있습니다. 변방마을의 수천여군사를 다른 상호 천호장들이 동원한다 하여도 그들의 거의가 성내에 살고 있고 천호장 어른께 합세하거나 이미 힘을 쓸수가 없게 됩니다.
내 생각과 같다.
의논이 끝난 뒤에 천호장 달솔은 깊이 생각하고 나서 검바우를 은밀히 불러 일렀다.
덕이란 자는 대단한 놈이다. 그가 일찌기 내 일을 돕겠다고 하고나서 댓가로 천여기를 떼어주도록 요구하고 예를 떠나겠다고 털어 놓았다. 짐깃 응낙하는체 하였으나, 사냥터의 싸움이 끝나면 곧 그를 잡아 죽이고 군사를 회동하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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