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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명문아니라도 적성맞춰 갈래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거야! 1년동안 「전쟁」을 치를자신있나?』
서울대를 비롯, 전기대 합격자가 발표돼 희비가 엇갈리던 20일하오. 대입재수(재수)A학원 면접시험장.
한결같이 어두운 표정의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다. 「제3의 입시」가 치러지고 있는 현장.
학력고사 2백65점(인문)∼2백70점(자연) 이상을 딴 학생들만이 면접시험에 통과하면 수강자격을 얻는다.
한때 「서울대보다 합격선이 더 높다」는 말까지 듣던 재수「명문」학원. 기준미달자는 학원이 정한 별도의 날짜(올해는 27일)에 필기시험을 치러야한다. 합격자는 반반정도.
×××
어머니와 함께 면접교사앞에 앉은 O군(18). 사립명문K대 국어교육과에 2지망으로 합격했으나 신체검사일인 이날 A학원에서 면접시험을치르고 있었다.
『소신껏 지원했더라면 어디든 떨어졌더라도 이처럼 맥빠지진않겠어요. 다시 공부해서 상경계를 꼭 가고 싶습니다』
도청소재지의 사립신흥명문B고출신. 서울대에만 20여명의 합격자를 낸다고 자랑해온 B고에서 인문계 1백80명중 10위권내에 들던 Q군. 그러나 학력고사에서는 예상외로 2백72점을 받는데 그쳤다.
평소 은행간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상경계를 원했던 Q군은 어려운 벽에 부닥쳤다.
『그 점수로는 「좋은 대학」상경계 합격이 어렵다. 학과를 바꿔 K대 사회학과면 합격권에 들겠다』
『명문대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상경계를 가겠습니다.』
어머니까지 동원돼 애원했으나 학교측은 막무가내.
『학과야 좀 마음에 안들더라도 명문대를 나와야 행세할수 있어』
Q군은 굴복했다. 사회학과를 1지망으로 K대에 원서를 접수했다. 그마저 뜻밖에 생각없이 써넣은 2지망에 합격한 것이다.
지난19일 합격자 발표후 가족회의가 열렸다. 「다니지않겠다」는 Q군의 결정을 심의했다. 이튿날 어머니와 상경, 재수학원을 찾았다.
『여자로서야 최고인기학과라는 명문대학의, 그것도 영문과에 합격해놓고 이게 뭡니까.』
면접장의 수험생 I양(18). 함께 온 어머니가 답답해 했다. 명문E대 영문과에 합격이 확정된 다음날 재수 학원을 찾은 것이다.
I양은 서울의 사림명문 C여고 출신의 재원. 반에서는 늘 1등으로 의예과를 원해왔다. 학력고사에서 2백84점을 얻어 문제가 생겼다. E대의예과가 어렵게 된 것이다.
대입전문가가 돼버린 부모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인문계역류. 담임교사가 좋아라고 동조하고 나섰다. 마침 E대는 인문계의 경우 동일계가산점이 없어 2백84점은 고스란히 인정됐고, 주위의 부러움속에 합격을 확인했다.
『여자가 좋은 대학 간판이나 따면 됐지 학과가 무슨 소용이냐지만 제생각은 전혀 달라요.』
느닷없이 재수를 선언했다. 부모가 매달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학교가 좀 뭐하더라도 의예과를 가겠어요』 부모도, 이제는 교사도 그를 말릴수 없었다.
하오5시. 지원자의 발길이 뜸해진 시간. 재수생치고는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험생이 면접교사앞에 다가왔다.
『Y대 건축과 4년생입니다. 1년동안 공부해서 의예과를 가고싶은데 가능하겠읍니까』
Z군(26). 지난해11월 군복무 3년을 마치고 제대, 앞으로 1학기만 지나면 졸업이라고 했다.
『대학 2학년때 건축학과에 필수적인 디자인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고민하다가 4학년이 되면서 군에 입대, 제대후에 결국 재수를 결심했읍니다』라고 했다.
『현재의 학과에서 졸업하면 그럭저럭 취직해 사회생활을 할 겁니다. 그러나 10년뒤의 나를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적성을 찾아 의사의 길로 진로를 바꾸는 것이 결코 늦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각 재수생 Z군의 말은 Q군과 I양의 고민에 대한 대답처럼 들렸다. 그리고 서울대법대를 졸업하고 경희대 한의예과로 전공을 바꾼 전동헌군(28)을 새삼 다시한번 생각케했다.
「명문」 좋아하는 부모나 「명문실적」 내세우는 고교가 감수성 예민하고 발랄하게 자라고 싶은 청소년들의 마음에 주름살을 안겨주고 있다. 당사자의 앞날을 적어도 10년은 내다보는 진로 지도가 아쉽다는 그들에게서 어른들은 오히려 배워야한다는 것. <한천수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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