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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사태, 국가 시스템을 수술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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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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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뉴욕 특파원

미국 대선을 보면서 갖게 되는 단상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막장으로 치닫는 선거의 혼탁함이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클린턴과 트럼프, 양쪽 진영이 서로에게 퍼붓는 험담과 인신 공격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준다.

또 하나는 국가 시스템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와 자신감이 대단히 견고하다는 점이다. 동맹 관계에 상처를 내는 발언을 일삼고 기존 무역협정을 재협상하겠다고 외치는 트럼프가 당선돼도 트럼프의 말대로 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미국 주류사회의 대체적인 평가다. 대통령 한 사람이 갑자기 바꿀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돼 있다는 인식에서다. 거기엔 “미국은 입법부와 사법부가 중심을 잡고 있다”는 믿음이 단단하게 깔려 있다. 그 시스템을 훼손하는 행위엔 가차 없다. 트럼프가 지난여름 ‘트럼프 대학’ 사기 혐의 사건을 담당하는 멕시코계 연방 판사에게 비난을 퍼부었다가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의 뭇매를 맞은 것이 단적인 예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을 부정하고 흔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국가 시스템은 정의롭고 바른 사회를 바라는 국민들의 꿈과 희망의 결정체다. 그 시스템이 건강하면 위기 속에서도 나라를 구해낸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는 위기가 참 많았다. 외환위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나라 곳간이 거덜나면서 졸지에 180만 명의 실업자가 거리로 내몰렸다. 그래도 한국은 일어섰다. 국민들은 위기 극복을 호소하는 정부를 믿었다. 집에 있던 금반지를 들고 나와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국회의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의 권한이 두 달간 정지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라는 끄떡 없었다. 고건(당시 국무총리), 이헌재(경제부총리), 반기문(외교부 장관) 등 쟁쟁한 행정가들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국민들이 국가 시스템을 믿었다.

안팎의 위기는 모진 시련을 안겨준다. 하지만 리더십과 국가 시스템이 살아 있으면 위기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순실 사태가 가져온 위기는 훨씬 엄중하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국가 시스템은 통째로 농락당했다. 묵묵히 일해온 일선 공무원들은 허탈감에 휩싸여 있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불신의 대상이 됐다. 내각은 존재감이 없다. 노 대통령 탄핵사태 당일 이헌재는 한강 다리를 일곱 번 건너 다니며 시장을 안심시켰다. 현 정부엔 그런 사명감과 치열함을 가진 이가 보이지 않는다.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또 다른 방증이다.

나는 이번 사태의 결말이 최순실과 비위 관련자에 대한 사법적 단죄로 그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국가 시스템이 깊은 곳에서부터 곪아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사정당국을 비롯해 정부 어디서든 비상벨이 왜 좀 더 일찍 울리지 않았는지 파헤쳐야 한다. 그래서 국가 시스템을 제대로 수술하자. 이런 참담한 사태를 또다시 겪을 수는 없다.

이상렬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