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의원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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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영국 의회에는 연설이 없다. 국회 의원이 단상에서 연설하는 것을 스피치라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청산유수로 말을 잘 해도 그것은 디베이트(debate)지 스피치가 아니다. 토론만이 있을 뿐이다.
의회 발언이 「연설」아닌 「토론」이 되려면 꼭 지켜야할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팔러멘터리 워드」, 의회적 언어를 써야한다.
「의회적 언어」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비 의회적(언팔러멘터리) 언어가 어떤 것인가를 먼저 알아보는 쪽이 더 빠르다.
영국 의회에서는 짐승을 의인화할 수 없다. 이를테면 「개 같은 X」이니, 「돼지 같은 X」따위는 비 의회적 언사로 징계감이다.
상대방에 대해서 아무리 증오와 분노가 복받쳐도 『귀 의원은 수의과 병원에 가셔서 진찰 한번 받아보시기 바랍니다』정도로 표현해야 한다. 「개××」라고 직설했다가는 국회의원을 오래 하기 힘들다.
의회에서 의원에게 연설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설은 일방통행일 뿐이다. 의회는 또 웅변 콩쿠르장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의회에서 토론 잘 하기로는 「처칠」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그가 수상일 때 웨일즈 출신의 야당 의원이 모진 발언을 했다. 그 질문을 듣고 있던 「처칠」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드디어 답변에 나선 「처칠」은 말했다.
『나는 지금 웨일즈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의사당은 폭소의 장이 되고 말았다.
전기 작가 「존·갠더」가 「처칠」에게 명 발언의 비결을 물었다. 그 대답은 남의 얘기를 잘 듣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정치의 본질은 토론이다. 토론을 위해서는 야당의 공격이나 비판도 꾹 참고 들어야 한다.
영국 의회는 의석 배열도 의장을 향해 앞을 보고 놓여있지 않다. 여야가 가운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이런 정치판에서는 한 정당이 진리를 독점하는 일이 없다. 한쪽 정당만 옳고, 상대당이 옳지 않다는 도그머에 사로 잡혀 있으면 의회 정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영국을 두고 의회 민주주의의 모범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요즘 우리나라 의회를 보자. 토론 아닌 연설은 폭언·욕설·증오·저주의 진열장이다. 어느 쪽을 가릴 것도 없이 국회가 열렸다하면 그 지경이다.
우리 나라의 교육 개혁은 먼저 「말의 교육」개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국회의원을 뽑을 때도 1차는 득표수로, 2차는 면접 시험으로 말의 품위를 채점해볼 필요가 있을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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