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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상읽기

구조개혁이 희화화되지 않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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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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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한국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

지금 우리 경제에 구조개혁보다 중요한 과제가 또 있을까? 추경 등 경기부양책도 사실 구조개혁에 따른 경기 위축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일 정도다. 구조개혁도 웬만한 걸로는 안 된다. 이 정부가 하려는 노동·공공·금융·교육 등의 개별 개혁도 중요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경제 생태계 자체를 확 바꾸는 총체적 개혁이 절실하다. 저성장과 고령화가 이미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그래픽 참조> 마이너스 성장이 닥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외환위기 때 겪어봤던 그 마이너스 성장 말이다. 이것만 해도 버거운 판에 양극화까지 겹쳤으니.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에는 양극화는 심하지 않았기에 우리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게다.

장밋빛 비전만 나열하는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겨서야
국민에게 고통 분담 호소하는 용기 있는 지도자 나와야

하지만 개혁이 어디 쉬운가. 성과연봉제 하나 갖고도 이렇듯 시끄러운데 총체적 개혁이라니. 턱도 없다는 지청구가 쏟아질 것 같다. 개혁의 대가들을 언급하는 건 그래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독일 경제 구조를 확 바꾸는 데 성공한 개혁안 ‘어젠다 2010’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혁신에는 지도자의 용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개혁 성과를 얻으려면 2~3년의 타임 갭이 필요한데, 이 기간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표를 좇는 정치인들은 대개 이런 용기가 없단다. 자기 희생도 강조한다. 개혁 때문에 선거에 떨어지거나 자리에서 쫓겨나더라도 정치인은 국익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거다.

고이즈미 도 개혁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가 총리였던 2005년께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도 인기 영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도 공고한 관료 조직의 대수술이었다. 개혁의 진정성을 국민에게 알리려면 강력한 기득권층부터 먼저 바꿔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김정수, 『고이즈미 개혁과 일본 경제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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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요컨대 지도자의 용기와 희생이 개혁의 성공 조건이란 의미다. 실제로 그렇다. 개혁에는 계층 간 갈등이 꼭 일어난다. 대부분 이해관계의 조정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갈등들이다. 정치인이 표를 생각한다면 이런 갈등에 뛰어들 리 없다. 하지만 개혁에 성공하려면 뛰어들어야 한다. 개혁으로 손해 보는 이해관계자의 반발을 극복해야 한다. 슈뢰더나 고이즈미는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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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런 지도자가 그리 눈에 띄질 않는다. 차기 대선후보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말로는 개혁을 강조한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대체로 듣기 좋은 장밋빛 비전과 표에 도움되는 언급들뿐이다. 가수 변진섭의 노래 제목 그대로 ‘희망 사항’만 나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금 논란이 단적인 예다. 복지를 위해 증세할 수 있다고 본다. 지적하고 싶은 건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왜 ‘증세’라면 자동적으로 대기업의 법인세와 고소득자의 소득세만 얘기하는가 하는 점이다. 전체 근로소득자의 48.1%, 전체 기업의 47%가 면세자인 현실은 외면하면서. 최고 세율을 올리거나 그런 구간을 신설하는 건 좋다. 하지만 동시에 면세자가 이토록 많은 비정상적 현실도 같이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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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 아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법인세를 쉽게 생각하는 듯하다. 내는 사람이 국민이 아니라 법인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싶다. 만일 그렇다면 오산이다. 법인세는 투자 등 경제 활력과 깊은 관련이 있는 데다 전가 가능성도 크다. 쉽게 손댈 세금이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그래픽>에서 보듯이 총 조세 중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높다. 올린다면 법인세보다는 부가가치세(소비세)와 소득세가 먼저다. 그런데도 부가가치세는 대부분 언급하지 않는다. 국민 모두와 관련이 있어서다. 오로지 얘기하는 건 부자 증세다.

중소기업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 얘기만 나오면 우리의 정치 리더들은 한결같이 ‘과감한 지원’만 강조한다.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재벌의 횡포를 근절하겠다는 얘기도 자동적으로 덧붙인다.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취약한 건 맞다. 문제는 왜 취약한가다. 정치 지도자들이 얘기하는 재벌의 갑(甲)질도 한 이유다. 하청 구조의 심화와 불공정 거래 등이 그것이다. 대·중소기업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갑질보다 더 큰 이유는 정부 지원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얘기하는, 그 지원 말이다. 예컨대 영업이익이 이자비용보다 적은 부실 중소기업들이 30% 정도다. 그런데도 이들이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건 신용보증 등 정부 지원 때문이 크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지원에 앞서 구조조정부터 먼저 하는 게 순서다. 생산성이 낮은 중소기업들을 과감하게 퇴출한 후 지원을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 지도자들은 구조조정 얘기는 일절 않는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없다. 구조개혁의 성공 여부에 우리의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희망 사항’만 나열해선 안 된다. 개혁의 성공을 위해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하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다음 정부에선 구조개혁이 희화(戱畵)화되지 않는다.

김영욱 한국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