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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갈라파고스 임금체계 만든 호봉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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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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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구
은행연합회장

정부는 노동개혁을 4대 개혁 과제의 하나로 정하고 경직된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를 위해 노사정 합의를 통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후속 정부들 역시 노사정이라는 틀 속에서 노동개혁을 위한 대타협을 계속 시도해왔으나 이제껏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사 간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다르다. 노동단체들 내부 또한 한쪽에서는 야권과 정책 연대를 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여권과 연을 맺는 복잡한 정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산별이나 단위별 노사협상을 보면 노조의 요구 사항만 협상테이블에 오르고 사측은 일방적으로 양보만 하는 것이 노사 역학 관계의 현실이다. 협상장에만 나오면 투쟁복에 머리띠를 두르는 노조의 협상문화 속에서 노사정이 상호 간의 이해와 양보를 바탕으로 합의점을 찾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성공적 노동개혁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국의 대처 총리는 물론, 젊었을 때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공공연히 외칠 정도로 급진좌파였던 사회민주당 당수 출신의 독일 슈뢰더 총리도 2003년 “독일을 살리기 위해 사회주의를 버린다”며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부 주도의 노동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우리는 노사정 합의에 막연한 기대를 걸고 20년을 보냈다. 그 결과 호봉제와 평생고용이라고 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인 갈라파고스 임금체계와 고용체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 호봉제 하에서는 신입직원의 초임까지 시장의 수요공급과 무관하게 기존 노조원의 임금상승률에 따라 매년 자동으로 인상된다. 그 결과 한국 대기업의 초임과 평균 임금이 일본의 대기업보다 높아졌다. 조직문화까지 해쳐서 ‘폭탄’이라고 불리는 문제 직원이라도 시간만 채우면 임금이 지속적으로 오르지만 이들을 처리할 마땅한 해결 방법이 없어 안고 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직된 임금구조와 고용구조는 임금피크제, 상시명예퇴직 제도라는 기형적인 제도를 낳았다.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 용역직, 외주, 자가 고용 등 희한하고 복잡한 고용형태도 만들어 냈다. 기수별 신입직원 채용방식은 기수문화와 순혈주의를 부추겨 다양성이 없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닫힌 조직을 만들어 놓았다. 이로 인해 산업수출은 경쟁력을 잃어 뒷걸음치고, 대기업 공장들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외국기업들 또한 철수하면서 청년일자리를 외국에 수출하고 있는 꼴이다.

경제성장률이 10%를 웃돌고 졸업만 하면 골라서 직장을 가던 시절에 자리 잡은 호봉제와 범법자가 아니면 해고가 거의 불가능한 평생 고용제도, 군대 신병 모집하듯 뽑는 기수별 채용 방식은 낡은 옷이 된 지 오래다. 경제성장률이 2%대를 턱걸이하고 청년 실업률이 10%를 훌쩍 넘어서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우리 코앞에 와 있다.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이 경제와 고용의 대종을 이루고, 디지털 경제와 공유경제로 대표되는 산업혁명 4.0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시대변화에 맞게 낡은 임금·고용체계는 물론 제조업 위주의 고도경제성장시대에 쓰인 노동법도 바뀌어야한다.

이런 변화가 가장 절실한 곳이 은행산업이다. 지난 10년 동안 은행의 순익은 4분의 1 토막 났다. 회사의 실적에 따라 늘거나 줄어야 할 인건비는 호봉제로 인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고정비가 되어 매년 평균 5.8%씩 증가했다. 은행권 수익성은 전 세계 100위권이지만, 은행산업의 초임은 5000만원이다. 세계최고 기업인 삼성전자 초임보다 고정급 기준 20%나 높고, 일본이나 미국 은행의 초임보다 높다. 평균임금 또한 200인 이상 고용 국내 대기업보다 50%나 높다 보니 신입직원 채용이 계속 축소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논리로 인해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은행에서 비정규직제도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똑같은 논리가 임금체계에도 적용돼야 한다. 동일노동을 하면서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지는데도 근무연수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월등히 높은 임금을 주는 호봉제야말로 노조가 주장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핀테크의 공습과 인터넷전문은행의 출현으로 지금과 같은 은행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처럼 은행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현재와 같이 경직된 임금체계와 고용구조를 고집한다면 은행산업은 ‘죽어야 산다’는 역설적 운명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하 영 구
은행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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