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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문학상] ④ 황순원문학상 예심위원들의 릴레이 심사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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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책갈피 혹은 깨지 않는 꿈
-정미경, ‘새벽까지 희미하게’(‘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최진영, ‘하룻밤’(‘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최근 들어 우리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의 중요성을 손쉽게 입이 올리곤 한다. 물론 그것은 급격하게 삭막해진 세상사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며, 인간에 대한 존중을 되살리고자 하는 절실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치 그런 능력이 어쩌다 보니 인간이 잃어버린 본래적인 성질인 것처럼 말해서는 곤란하다. 마치 자각하기만 하면 다시금 손쉽게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인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란 역설적으로 그것의 ‘획득 불가능성’에 의해서만 암시된다. 타인의 삶과의 마주침 속에서 치열하게 마찰하는 사이에 도저히 ‘나는 타인일 수 없다’고 느낄 때에야 비로소 상상적인 타인(他人)은 실제의 타자(他者)가 되며, 느슨한 공감은 첨예하게 윤리화된다.

정미경의 ‘새벽까지 희미하게’는 이처럼 희미하게 싹트는 감수성의 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자각이 언제나 ‘뒤늦음’ 속에서만, 어떤 확실성도 없이 도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실상은 ‘새벽까지 희미하게’ 존재하는 셈이다. 주인공 유석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의 전체 이야기는 유석이 현재 처해 있는 회사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막다른 길에 봉착해가는 와중에, 과거 자신의 사무실 직원이었던 송이에 대하여 반추해나가는 단속적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과거 이야기의 환기와 현재로의 삽입은 유석이 그림책 작가가 된 송이의 인터뷰 내용을 뒤늦게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송이는 과거의 시간들까지도 수렴한 채 여전히 유석에게는 멀고도 가까운 곳에 존재했으며, 유석에게 있어 그러한 멀고도 가까운 송이의 존재는 그의 삶을 긴장하게 한다.

“유독 먼 곳의 얘기, 먼데 사는 사람 얘기”를 잘 하던 송이는 실상 자기가 처한 삶의 바닥을 거리낌 없이 들춰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거리감 자체가 희미한 송이는 원근법적인 세계에서는 잘 눈에 띄지도 않고 따라서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기 어려운 사람이기도 하다. 반대로 유석에게 있어서는 잘 정돈된 거리감이 중요하다. 형편이 어려운 삶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멀찍이 앞서 있는 강주와의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사실 유석에게 있어 세속적인 자기 인식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철저하게 시장의 트렌드와 추세를 따르며 외국으로만 돌아다니는 강주의 삶이 얼핏 구체적으로 보였지만, 실상 그것은 유석에게 어떤 실감도 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일 뿐이다. 오히려 그러한 허울뿐인 원근법적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은 유석이 과거 송이의 삶을 응시했던 순간들이다. 이는 유석이 감당하기 힘들면서도 동시에 송이에게 이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는 달은 현실의 출구가 아님을, 유석도 송이도 알고 있다. 유석에게 있어 송이 역시 출구는 아니다. 온전한 ‘열림’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의 ‘수렴’도 아닌 지점에서 그들은 암시적으로만 만난다. 아주 먼 곳인 동시에 가까운 곳에서.

물론 그것은 불확실한 만남이며, 여전히 우리는 타자에게서 미끄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완전히 닿을 수 없는 타인의 흔적으로서 기억의 원근법을 넘어서는 삶의 책갈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억은 확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하게 희미한 불확실성에 의해 지지되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유석은 여전히 송이에는 미칠 수 없는 근본적인 거리감을 낭만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면에 기억의 확실성이란 오히려 회피하고 싶어지는 과도한 대상이다.

한편 최진영의 ‘하룻밤’은 감출 수 없는 실재의 임박함을 어떻게든 지연하거나 연기하고자 하는 불안으로 넘쳐나는 텍스트다. 따라서 '새벽까지 희미하게'와 '하룻밤' 두 작품은 공히 과거라는 ‘현재의 타자’와 만나는 꿈의 형식들에 가깝다. 타자와의 만남이 ‘새벽까지 희미하게’에서 잠재적으로 예비되는데 그친다면, ‘하룻밤’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은 의도적으로 회피되거나 빗나가는 방식으로만 수행된다. 문제는 그 형식에 있다.

아주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진영의 ‘하룻밤’은 현실이라기보다는 깨어 있는 채로 꾸는 꿈에 가깝다. 꿈은 언제나 탁월한 이야기의 원천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매력적이기만 한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소설 속에서 꿈이 지니는 진정한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은 강력한 백일몽, 꿈이 꿈인 줄도 모르는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젊은 청년들이 하룻밤 놀기 위해 클럽을 찾는 에피소드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에 특별한 해석을 요구하는 지점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를 청년 세대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은 과잉이 될 것이며, 그들 사이의 불협화음이나 피상적인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새롭지는 않다. 오히려 이 텍스트의 특이성은 모든 서사적 사건들(인물들의 만남과 대화)이 모두 필사적인 엇나감이자 의도된 제스처라는 점이다.

서술자인 ‘나’의 시종일관 어긋난 태도의 이면에 있는 진실은 그가 겪은 과거에 있음이 밝혀진다. 학창시절의 트라우마적인 경험 속에서 친구 J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죄의식은 물론이고, 정작 실제 원인제공자인 P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를 옥죄는 것이다. ‘나’는 실상 현실이야말로 나른한 꿈이며, 그러한 꿈에서 깨어나는 자각의 순간이야말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지옥이란 외부적 환경이 아니라 이미 나와 일체화된 심상풍경이라는 사실이다. “난 내가 싫다. 내가 있는 곳은 다 싫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룻밤’은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무게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하룻밤 사이의 꿈이며, 이뤄지지 못하는 소망충족의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지점은 ‘나’가 “그렇게 오늘을 흘려보내면 되는 거겠지. 하루쯤은 그래도 되는 거겠지”라고 되뇌는 순간이며, 다시 현재가 곧 과거인 악몽의 순간이다. 과도한 기억의 책무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기억의 부채가 가장 강력하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공히 두 작품들은 ‘기억’과 관련된 방식으로 이야기의 모든 과정을 첨예한 적대의 순간으로 현재화한다. 여기에 종결된 사건이란 없으며, 따라서 애도란 불가능하며 끝내 우리는 진정한 타자, 망자의 입장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은 일종의 허울이며, 오히려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밑바닥이며 맨얼굴, 감당할 수 없는 과거에의 부채의식이다. 물론 ‘새벽까지 희미하게’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지속되는 삶의 차원이 있다면, ‘하룻밤’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충동의 차원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에게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인간의 두 얼굴이다. 이러한 야누스적인 과정 속에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란 어쩌면 우리 안의 서로 다른 얼굴들을 어떻게 가깝고도 먼 곳에서 마주보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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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성
문학평론가. 광주광역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과 대학원.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재 서강대·서울예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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