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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아내는 악처 아닌 현부"|미서 출간 된 「소피아의 일기」토대로 재평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소피아」(「소피아·안느레예프나·톨스타야」·1844∼1919)라고 하면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1828∼1910) 의 아내이자 세기적 악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그녀가 썼던 일기가 뒤늦게 출간됨으로써 그녀는 성자인 남편을 일방적으로 괴롭힌 여인이 아니라 「톨스토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여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오히려 많은 전기 작가들은 이 일기를 바탕으로 해서 이들 부부의 불화와 갈등을 「소피아」 의 탓이라기보다는 「톨스토이」 의 2중성 때문이었다 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소피아」 의 일기는 78년 모스크바에서 첫 출간 된데 이어 지난해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이것을 다시 월간 문예지 『동서문학』 이 입수해 국내에 번역, 소개할 예정이다 (5월호) .
「소피아」가 「톨스토이」와 결혼한 것은 18세 때였다. 「톨스토이」 는 그때 34세로 이미『유년시절』 등 자전적인 소설들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시작부터 유쾌하지 못했다. 결혼 전에 「톨스토이」가 준 그의 일기를 통해 그녀는 남자의 방탕한 과거와 복잡한 여자관계를 알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혼 10개월 후에 「소피아」는 자신의 마음을 『지난 9개월 동안은 나의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고 일기에 적고있다. 또한 「소피아」 의 여동생 「타냐」 (17세) 가 20년이나 연상인 「톨스토이」의 형과 염문을 뿌리다 헤어지는 바람에 그녀는 2중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내 화합했으며 서로 사랑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했다.
1860년대와 1870년대 초반은 두 사람의 긴 부부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 그들은 결혼 첫11년 사이에 8명의 자녀를 낳았다(두 사람은 모두 16명의 자녀를 낳아 그 가운데 13명이 생존했다.)
결혼당시 「톨스토이」의 창작력은 최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대작가로서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남편의 작품을 복사하는 일이며 앞으로 쓸 작품에 대해 토의하는 일은 물론 남편이 서재에 박혀 있는 동안 광활한 영지를 혼자서 관리하고 집안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이들 부부관계는 1870년대 후반부터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다. 남편이 아내와 자식들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거의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 무렵 자기 나름의 어떤 종교를 창출하느라 정신적· 도덕적 분기점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여자가 임신 중일 때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동물적이며 도리에 어긋나는 일」 이라며 아내를 멀리함으로써 그녀를 더욱 절망감에 빠뜨리기도 했다.
「소피아」는 그밖에도 마구잡이로 늘어나며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가는 남편의 제자들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가장 괴롭힌 것은 새로이 시작된 남편의 채식주의였다. 그 때문에 메뉴를 두 가지로 준비해야했으며 그만큼 시간과 돈의 낭비를 가져왔다.
또한 세속적인 재산 따위는 관심이 없다고 큰소리 치면서도 「소피아」 에게는 끊임없이 돈타령을 해왔다.
그러나 이런 역경 속에서도 그녀는 남편의 작품들에 대한 저작권을 최대한으로 보호하기에 심혈을 쏟았으며 당국의 검열로 발매가 금지되었을 때에는 황제에게 달려가 탄원함으로써 허가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녀는 또 남편의『인생론』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남편의 요청에 따라 영국이나 독일의 저서들을 러시아어로 번역해주기도 했다.
이들 부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후반으로 「톨스토이」 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스승에게 가장 헌신적이며 광신적이었던 「체르트코프」의 끊임없는 출현 때문이었다.
그는 「톨스토이」 의 유언장 작성을 비롯해 많은 일로「소피아」와 충돌하게 된다.
이 「체르트코프」 가 가족 일에 끼여들어 영향력을 행사하자 「소피아」 는 신경의 불안정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극단에 이르렀을 때는 자살까지 시도한 적도 있었다.「소피아」 에게 마지막 타격이 온 것은 1910년10월이었다. 남편 「톨스토이」 가 이른 아침 자기를 찾지 말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긴 채 집을 나가고 만 것이다.
그는 남편이 쓰러졌다는 아스타포보 역으로 달려갔지만「톨스토이」 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그 이후 그녀는 여생동안 오로지 남편의 사후명성을 명예롭게 하는데 헌신했다. 9년뒤 그녀는 죽어서 남편 옆에 묻히기를 희망했지만 그 소원조차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곳에서 2마일 떨어진 시골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소피아」 의 일기에서 일부 과장된 부분과 불공정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많은·전기작가들은 무려 57년에 걸쳐 50만 단어로 기록한 이 방대한 일기를 통해 아내 「소피아」 가 아니었더라면 천재 「톨스토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녀를 높게 평하고 있다. <양헌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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