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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북으로 간 연예인들의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l949변 9월12일 오전 10시.
평양 모란봉 운동장은 수십만명의 인파로 메워졌다.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 경축대회가 열린 것이다. 정권수립 선포일자는 그보다 앞서 9월9일이었다. 6 당시 약 60만명의 평양시민 가운데 반수 이상이 그 정치 선동 쇼에 동원되었다.
그 자리에서 각계 각층의 대표 10여명이 장황한, 판에 박은 경축 연설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멋들어진 억양과 제스처로 김일성을 비롯, 북괴 고급간부들의 눈길을 끈 건 이른바 「남조선 무대예술인」을 대표한 여배우 박영신과 남자 배우 황철 이었다.
이후 박영신은 황철과 함께 북괴의 국립연극극장 중견배우로 활약, 북에서 누가 함부로 괄시할 수 없는 위치를 확보했다.
박영신은 8·15해방 후 서울에서 「연극동맹」에 가입, 정치선동 극에 몰두하다가 47년말에 월북했다.
그녀는 월북 여배우들 중에서 지난날 유일하게 체계적인 학교공부를 한 여인이었다. 즉 1929년 본적지인 함흥 영생고녀를 졸업했다. 당시로서는 그만하면 인텔리 여성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공산당이 가장 중시하는 출신 성분도 좋았다. 즉 박영신은 1930년대초 간도 용정에 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잡혀 옥사한 것이다. 어머니마저 병사했다. 따라서 북괴 입장에선 박영신은 이른바 「혁명가 유자녀」인 셈이다.
부모를 잃었을 때 박영신에겐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후일 (8·15후) 연희 대 국문학교수가 된 박××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당시 이국 (만주 간도)에서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된 박 남매는 유랑걸식하며 본적지인 함흥으로 돌아왔다.
노래를 잘 부르고 피아노 연주재간이 있는 박영신은 유치원보모를 거쳐 함흥 동명극장의 피아노 연주자 겸 막간 가수로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그 뛰어난 재질을 인정방아 1930년대 중반 서울로 진출, 동양극장 전속 극단인 「아랑」의 중견배우가 되었다.
그후 그녀는 수많은 신파 연극에 출연했다.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는 조연인 기생 춘외춘 역을 맡아 주연인 홍도 (차홍녀 분) 보다 더 호평을 받았다. 이 무렵 박영신은 배우 김두찬과 결혼, 무대에 같이 섰다.
일제 말인 l943년 9월 제2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박영신은 이른바 「조선어 극」 부문에서 개인 연기 상을 방았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전 회에서 소개한 월북 배우 김선영은 「일어 극」 부문에서 연기 상을 탄 것이다.
박영신은 미모는 아니지만 성격이 호방하고 당시 여배우들 중에서 유일한 연극 분야의 이론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1947년 그녀가 월북할 때 동생은 누나를 따르지 않았다. 월북후 박영신은 북괴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62년 1월 그녀는 월북 여배우로서는 무희 최승희에 이어 두 번째의 「인민 배우」 칭호를 받았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북괴 「국립연극극장」 총장 감투를 썼다. 이어 그녀는 66년 북괴 내각의 문화상 (장관)으로 중용 됐다. 일개 여배우의 파격적인 출세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을 의식한 북괴의 대남 공작 차원의 선전 놀음이었다. 그후 박영신이 가끔 판문점에 뽐내고 나타나서 남한 무대예술인들의 안부를 묻는 언동에서도 알 수 있다.
북괴의 그 같은 박영신 이용 전술도 마침내 한계가 드러났다. 그녀는 60년대 말부터 노폐물 취급을 받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 초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무희 최승희의 경우처럼 현재 북한에 엄연히 살아 있는데도 북한의 정계는 물론 문화예술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기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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