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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사진관] 마음 속 등불을 밝히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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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폭력이 됩니다. 요즘 날씨는 더위라고 하지 않고 폭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더위의 폭력은 사실 이미 절정을 지났습니다. 지난 7일이 입추였습니다. 덥든, 춥든 시간은 자기만의 속도로 흘러갑니다. 그러고 보니 숨을 헐떡거리게 하는 더위 속에서 한 줄기 가을바람이 슬쩍 스치는 듯해 잠시 뒤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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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이나 찬방에서 켜던 등잔. 아궁이에서 나는 구수한 밥 냄새와 찌개 냄새가 배어 있을 것 같다.

더위가 꺾이면 가을. 등을 가까이 한다는 등화가친의 계절입니다.

깜박이던 호롱불, 연탄과 친구 사이인 백열전구, 쌀쌀맞은 형광등을 거쳐 이제 바늘 끝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새침한 LED 빛이 밤을 통째로 밀어냅니다. 밤이 밤 같지 않은 시대여서 그런지 가끔 밤이 밤다웠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책 읽던 선비 곁에서, 바느질하던 여인 곁에서 조용히 수줍은 빛을 내어주던 우리의 전통 등잔은 밤다웠던 밤과 함께 오래전 우리 곁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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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형 백자 등잔. 책을 읽을 때 사용하여 서등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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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걸이 등. 등잔받침 아래 기름찌꺼기를 받는 기름받이가 있다. 걸쇠 장식은 새, 나무, 기하학적 무늬를 단순화한 모양이다.

오늘 우리의 조명 문화는 천정을 기점으로 해서 인간의 머리를 내리누르는 수직적인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에 비해 등잔이나 촛대는 인간의 눈높이에서 수평적이고 소박한 빛을 속삭이듯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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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 뒤쪽 바닥에 두고 사용하는 등. 질그릇으로 만든 집 속에 등잔을 넣어 바람이나 음식을 끓일 때 생기는 수증기에도 불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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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로 만든 등잔대. 4단의 걸개가 있어 등잔받침과 기름받이의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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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문양의 파초형 불후리 유기 촛대. 박쥐는 예로부터 길한 동물로 여겨져 안방의 촛대 장식에 많이 이용했다.

인간의 문명은 불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부엌에서의 불이 인간의 육체적 진화를 이끈 동인이었다면 밤을 밝힌 불은 어둠 속에서 인간을 끌어내 문명을 향해 걸어가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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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은 촛대, 기둥 중간에는 등잔받침이 있는 촛대겸용 목제등잔대. 연잎 형태의 밑받침에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양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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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형의 밑받침, 기둥, 초받침, 불후리를 은입사로 세밀하게 장식했다. 중앙에 `희(囍)`자를 새겨 길상의 의미를 더했다.

무차별적이고 위압적이어서 한밤의 수면마저 밀어내는 현대의 조명과 달리 전통 등잔은 밤을 밀어붙이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만 어둠을 잘라냅니다. 별빛을 가리지 않는 빛, 내밀하고 부드러운 등잔불은 정리할 것, 생각할 것이 많은 가을밤에 운치를 더합니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그저 불을 켜두기만 해도 마음까지 환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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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처소에서 불을 밝히던 용머리 장식 목제등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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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장식없이 나무의 멋을 살린 등잔대. 일반 가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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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에서 사용한 철제 휴대용 촛대. 바닥에 놓는 대신 벽에 꽂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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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62cm의 촛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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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등 역할을 한 조족등. 조선 후기의 등잔이다.

글=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사진=한국등잔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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