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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 못 따라가는 문재인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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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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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을 허용한 뒤 지난 1주일간 중국의 반응은 거칠고 난폭하다. 제동을 걸어야 한다.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그 어떤 변명도 무기력하다. 사드 배치는 한반도의 수요를 훨씬 초월하는 것인 만큼 배후의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엊그제 외교부 루캉(陸慷) 대변인이 “한국은 해당 절차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한 대목에서 모욕감을 느꼈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 중국은 왜 남의 나라 정부의 자기 영토 내 조치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가.

현재 중국은 한반도에 근접한 세 지역에 중·단거리 미사일 기지를 배치해 놨다. 지린성 퉁화(通化)와 산둥성의 라이우(萊蕪), 랴오닝성의 다롄(大連)이라는 곳인데 사거리는 600~1800㎞다(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한국 전역이 그들의 레이더 탐지와 미사일 공격 범위에 들어가 있다. 우리 정부가 “기지를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라”고 촉구하면 중국 정부는 받아들일 건가. 중국은 ‘웬 내정간섭!’이냐고 일축할 것이다. 자기들은 수많은 활과 창을 갖고 있으면서 기껏 방패 하나 마련하겠다는 상대한테 그것마저 빼앗겠다고 달려드는 형국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건 꼭 공자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인간사회의 최소 양심이다. 큰 나라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요구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일부 한국 정치인들에게서 대국이라는 이유로 중국을 덮어놓고 두려워하거나 알아서 기는 듯한 모습이 비춰지는 건 유감이다. 대국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소국의 단단한 태도다. 인구 1000만 명도 못 되는 스위스나 이스라엘은 세계 어떤 강대국한테도 꿀리지 않는다. 몸집이 커도 시야가 좁고 흐물흐물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작아도 눈빛 매섭고 정신과 의지가 살아 있는 국민들의 나라도 있다. 요새 사드에 대처하는 인물군 중에 대조적인 두 사람은 남경필과 문재인이다.

두 사람이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린 글을 보면 누가 더 대국적 안목이 있는 지도자감인지 비교된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3대 원칙을 얘기했다. 사드는 ①국가 주권에 관한 문제(본질적 성격) ②한반도 방어용(공간범위) ③북핵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시간수명)는 것이다. 나는 사드에 대해 이렇게 간명하고 호소력 있는 글을 본 적이 없다. 3원칙은 중국한테 정성스럽게 반복해서 설명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③번은 정부가 미군과 합의해 공식으로 공표해야 할 부분이다. 사드 체계는 주한 미군의 소유이지만 무한정 한국에 있는 게 아니라 북핵의 소멸과 함께 철수시키겠다는 의미다. ‘사드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이라는 중국의 의구심을 풀어줄 수 있는 묘약이다. 남경필은 중국을 방문해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 등 공산당 실세들을 만나 사드 3원칙을 설명하고 어제 귀국했다. 체면과 모양새를 중시하는 중국 지도자들은 처음엔 안 먹혀도 다각적으로, 끈질기게, 될 때까지 대화할 필요가 있다.

반면 문재인의 페북엔 우리 정부의 3대 잘못이 적혀 있다. 사드 결정은 ①본말 전도 ②일방 결정 ③졸속 처리라는 것이다. 사실을 발견하는 언어라기보다 주관적이고 상투적인 표현법이다. ①은 북핵 문제 해결이 본(本)이고 사드 배치는 말(末)인데 말을 중시함으로써 본은 멀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북핵 문제 해결, 즉 북한의 핵 폐기는 북·미 수교 같은 정치적·전략적 조건교환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사드 배치 같은 기술적·작전적 이슈는 북핵 폐기와 관계 없다. 수준이 다른 이슈를 혼합시킨 오류다. 결론적으로 문재인은 사드 결정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다. 책임윤리보다 신념윤리에 충실한 시민운동가 같다. 아니면 정치평론가. 중국 정부의 국내 대리인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지 모른다. 문재인의 글엔 대중국 설득 논리와 열정이 결여돼 있다. 중국이 날이 갈수록 안하무인처럼 구는 건 문재인 같은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들의 미약한 대외 의식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