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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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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영어권 책이 대부분 그렇듯, '여자'의 내용도 '그 은밀한 지리학'이라는 부제에서 잘 드러난다. 몸 속 깊은 곳에 자리잡는 난자에서부터 자궁.클리토리스를 거쳐 유방과 뇌로 초점을 옮겨가며 여자의 몸이 간직하고 있는 신비와 호르몬의 작용을 풀어냈다.

'지리'를 탐구하는 여정에는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가 하면 향기로운 샘이 보이고 컴컴한 동굴이 나타나 여행자를 당황하게도 만든다. 그러면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나탈리 엔지어가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과학 및 의학적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궁금증을 풀어준다.

남녀간 차이를 논하는 대목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그래서 얼핏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을 걷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여성은 제2의 성, 불완전한 성이 아니라는 주장이 강하게 깔려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99년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된 직후 "'여자'는 해방 생물학 서적이다. 여자의 몸으로, 아니면 여자의 몸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권했다. 기본적으로는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여자에 관한 책이다.

이 또한 여자에 대한 편견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혹시 과학이라면 거부 반응부터 보이는 여성이라면 이 책을 통해 편안하게 자신의 몸 구석 구석을 들여다보며 각 신체 부위에 잠재하고 있는 환희와 쾌락을 한껏 확대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과학과 의료 관련 자료만 아니라 신화와 역사.미술.문학의 세계까지 거침없이 드나드는 지은이의 정보량이 놀랍다. 그 많은 정보를 유머와 일화로 녹여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남자들의 귀두와 달리 꼭꼭 숨어 있어서 여자들조차도 궁금해하는 클리토리스의 역할부터 살펴보자. 클리토리스는 8천개 가량의 신경 섬유로 뭉친 신경덩어리이다.

그렇게 예민한 것이 오줌을 누거나 사정을 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니 결코 실용적이지 못한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순전히 여성의 쾌락을 돕는 일 외에는 달리 목적이 없다. 같은 성행위에서도 남자와 달리 여자가 여러 차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비결도 클리토리스에 숨어 있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동맥을 통해 피가 클리토리스로 흘러들지만 정맥의 흐름이 막히지 않기 때문에 남자의 성기처럼 단단해지지는 않는데, 팽창과 수축을 자주 할 수 있는 그 능력 때문에 오히려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 같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론한다.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은 유아 오르가슴인 반면 질 오르가슴은 성숙한 오르가슴이다. 그렇기 때문에 퇴화한 음경(클리토리스)에서 여성의 질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야 여성이 성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여자 몸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오해에서 나온 이런 이론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왔다는 지적이다.

지은이는 "이런 사회적 편견에다가 여자들마저 성기의 구조와 역할을 적극적으로 배우려 들지 않아 여자들이 '정신적 음핵 절제'를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제 자궁의 구조로 옮겨간다. 임신하지 않은 성인 여성의 자궁은 무게 60g에, 길이가 7.6㎝에 불과하다. 그러나 임신 말기에 이르면 9백g으로 늘어난다. 자궁은 자궁 본체와 자궁경부로 돼 있는데 자궁경부는 윤이 나는 도넛 모양이라고 한다.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환자의 골반검사를 할 때면 왠지 배가 고파진다는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이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저 그 의사는 도넛을 좋아했을 뿐이다.

여성의 심리를 털어놓은 후반부 중에서 '여자는 지위가 높고 나이 든 사람에게 끌린다'는 통념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똑똑한 여자는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고르면 결혼생활이 평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곧 상품 가치가 떨어졌다는 말이므로 아무래도 상대에게 감사하는 맘이 크고 더 너그러워질 것이다. 이는 곧 여자에게 '숨'을 쉴 여지가 더 커진다는 말이다."

특히 에스트로겐 등 호르몬을 다룬 후반부는 갱년기에 접어든 여자들에게 제 2의 삶을 활기차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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