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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엘 간다는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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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고향 평양의 추억은 대동강에로 이어진다.
집에서 걸어서 5분거리밖에 안되는 대동강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잔병이 많았던 나는 여름철이면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겨울이면 썰매타는 친구들을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 대동강의 추억은 여학교를 졸업, 연극에 빠져들었을 때로 다시 이어진다.
1947년에 평양제일고녀를 졸업한 나는 이듬해인 17세때부터 연극무대에 섰다. 사춘기시절 나는 대동강가를 거닐면서 연극대사를 외기도하고 소녀의 꿈을 키우곤 했다.
49년에 연극 『외과의크레체트』에서 시장딸 「마이아」역을 맡았었는데 대단한 인기를 끌어 이름보다는 「마이아」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려졌다.
심장병을 앓으며 친구들이 뛰노는 것만을 보아오던 철부지소녀는 대동강물이 흐름에 따라 어느덧 연기자로 소녀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몸이 나빠져 황해도 신천온천에서 요양을 했는데 그때 6·25를 만나 가족들과 헤어졌다. 급히 평양으로 와보니 집안은 텅텅 비어 있어 다시 대동강가로 나와 아버지와 남동생을 그리며 목놓아 울었다.
나의 집은 평양시 신창리 101번지. 세간 기와집에 뜰이 꽤 넓었다. 8월이면 봉숭아가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요즘도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고향생각에 잠기곤 한다.
개구장이 시절을 보낸 상수리 상수국민학교까지는 집에서 걸어서 10여분거리.
평양시내 중심가로 다녔는데 어릴적 신기하게만 보였던 여러가지 물건을 팔았던 화신백화점이 아직도 생각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어머니를 졸라 화신백화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지우개·연필·꽃종이·예쁜 인형들….
천신만고끝에 월남하신 어머니와 연락이 닿아 극적으로 자유를 찾을수 있었던 나는 지금도 평양집이 삼삼히 눈에 떠오른다.
아버님은 살아계시며 세 남동생들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이제 8월 한가위가 한달남짓 남았구나. 식도락가이신 아버님때문에 우리집은 평소에도 큰 소쿠리에 하나 가득 떡살을 담그곤 했다.
팔월 한가위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송편을 빚고 노티떡을 만들곤 했는데…. 올 가을에 맞는 추석에는 40년만에 고향방문단이 왕래할수 있다하니 내마음도 괜스레 더 떨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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