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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대비」속에서 연기는 뜨겁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제7호태풍「제프」의 영향으로 날씨가 잔뜩 찌푸린 5일 상오11시 경기도양주군 주내면삼숭2리의 넓은 초원.
MBC-TV가 사용하고있는 체력단련장겸 야외촬영장에서는 국립극단 단원27명이 오는17∼23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막이오를 연극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근삼작·허규연출)의 때아닌 야외연습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이날은 새벽부터 소나기가 오락가락해서인지 날씨는 더없이 시원했고 푸른잔디밭에도 싱그러운 물방울들이 아침이슬처럼 맺혀있다.
『자, 서장 준비』
연출가 허규씨가 단원들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잔디밭에 모아놓고 숨돌릴 틈도없이 다그쳤다. 이들이 난데없이 야외에까지와서 연습에 열을 올리게된것은 얼마전에 개수공사를 끝낸 4층 극단연습실의 페인트냄새때문. 하루4∼5시간의 연습을 강행하다보면 단원모두는 두통에 시달려야만했다.
그렇다고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공연시간때문에 하루도 쉴수없는 처지.
결국 궁칙통으로 생각해낸것이 이 야외연습장이다. 국립극단으로서 10년만에 갖는 야외연습이라고한다.
이 연극은 광복40주년 문화행사로 국내에선 첫 기획된 심퍼닉드라머다. 심퍼닉드라머는 연기·음악·무용·조명·음향효과등이 동등한 비중으로 취급되는 발전적인 연극형태.
국립극단 단원39명, 발레단21명, 창극단15명, 합창단15명등 모두 90명이 출연하는 대형극.
연습이 시작되자 유령 이동석으로 분장한 원로배우 장민호가 먼저 등장한다.
이어 유령에게 관광세일을 맡고 나선 익살스런 관광안내원 (김재건분).
『이동석씨, 안내원입니다. 관광계획을 말씀드리겠읍니다. 9시 당신이 태어난 통화동, 9시30분 네살때 이사간 반포동, 10시…』
『여보, 좀 천천히 얘기할수 없소?』
『우린 바빠요』
3·1운동때 25세의 젊은 나이로 숨진 이동석이 하늘나라의 특별휴가로 자신의 제사날에 지상에 내려온다. 젊은시절 헤어졌던 아내(백성희분)는 팔순노파로 변했고 자신이 태어난 곳은 기상천외한 헬스클럽으로 바뀌어 있다는 해학적인 삶의모습을 보이는 연극이다.
『그렇게 돌지말고 그 반대로 돌아. 도는 사이에 공간이 너무 벌어지잖아』
연출가의 지적이 서릿발같다.
1시간쯤 진행됐을까. 모두 땀을 뻘뻘흘리며 연기에 몰입하는데 가랑비가 푸른초원위로 물안개처럼 뒤덮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연기자모두가 신들린 사람같이 빗줄기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없다. 10여분의 시간이 더 흐른뒤에 갑자기 먹구름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며 장대비가 잔디밭을 뒤흔든다.
그래도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없다.
『좀더 가까이 다가서고』연기가 마음에 들지않는 듯 연출가의 표정은 대본을 내던질듯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 참다못한 손숙이 한마디한다.
『선생님, 비오잖아요.』
『응? 그렇지. 모두저쪽 천막있는데로!』
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단원들의 태도는 돌변해 천막을 향해 단거리선수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럴수가 있을까할 정도의 드러매틱한 변신이었다.
결국 이날 야외연습은 예상치않았던 태풍 「제프」의 영향으로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간간이 빗줄기가 멈출때마다 끈질기게 모여 3시간의 연습시간을 가졌다.
하오6시.
귀가버스가 의정부시에 진입할 때 극단고문으로 따라나섰다가 비만 맞은 원로연극인 이해낭씨가 이번무대에 사는 친구 김동원씨에게 말했다.
『피난시절에 부산·대구로 돌아다니며 연습했던게 생각나누만. 이렇게 비오는날도 있었지…』 『그래, 그게 벌써 35년전 일이야. 광복도 엊그저께 일같은데 말야. 연극은 그냥있는데 세월만가니, 원…』 <양헌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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