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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연합"은 이뤄질것인가|고병익박사가 내다보는 그 환상과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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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전에 인도 각지를 여행하면서 북쪽으로 중공땅을 넘겨다보는 지점까지 몇군데를 찾아올라간 일이있다. 에베레스트 동쪽의 휴양도시 따지링, 인더스강 상류의 티베트족의 거주지 레에시(해발3천5백m), 또 캐시미르 북쪽의 험산준령을 뚫은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려 중공의 신강성과 연결되는 훈자지방까지 찾아간 일이 있다.
중국대륙의 접경지역중에서 남들이 좀체로 가보기 어려운 이런 지점들을 가면서도 나는 아직 이웃인 중국대륙 자체에는 발을 디뎌 본적이 없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분야를 공부하고 가르쳐온지 40년이 되었으면서도 대륙땅을 직접 밟아본 일이 없이 멀리서 넘겨다만 본다는 것이 나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극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라전체로서도 중국대륙과 내왕이 두절되어온지 30여년이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아마도 우리의 역사상 없었던 일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우리나라 자신의 남북분단의 현상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부자·형제와 부부가 갈라졌는데도 서로 내왕은 커녕 편지교환조차 못한 지가 40년이 되었으니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아마도 비교할곳이 없을것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몇나라들의 통합이라는 문제를 문제거리로 삼는것조차 잠꼬대같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 내일을 생각할 적에 이러한 문제들도 일단 생각을 가다듬어 둘 필요가 있는것이고 더구나 근년에 들어와서는 구미의 학자들에 의해서 언급된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근년에 들어와서 동부아시아가 하나의 경제적인 세력으로 부상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이야기되고 있다. 패전했던 일본이 부흥을 해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때에는 일본이 본래 명치유신이래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근대화에 성공한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본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능력이 이를 가능케 하였다고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그후1960연대부터 홍콩·대만·한국·싱가포르 등의 지역이 후진국들 가운데서는 뛰어나게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계경제속에서 은연중 하나의 세력을 형성함에 이르러서는 일본과 이들지역을 묶어서 하나의 공통적인 사회·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한 경제성장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동아시아지역의 경제발전이 과연 유교전통의 힘이냐, 또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한 것이냐 하는 문제에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확실한 것은 동아시아가 이제는 낙후되고 퇴영적인 후진지역이 아니라 활기찬 경제발전을 거듭하고있고 앞으로도 더 성장해나갈 지역이라는 것이 이지역 밖에서나 안에서나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중국대륙이 아직은 과다한 인구와 심한 빈곤으로 허덕이고있고 북한이 극도로 경직된 정치문화속에서 균형있는 경제발전을 못하고 있으나 앞으로 결국 모두 상당한 경제세력을 이룩하게 되리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리하여 동아시아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경제세력을 이루어 지금까지의 구미의 우월적 지위에 도전을 하고있는데 만약 서방이 이들을 보호주의 장벽등으로 배척하려한다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가적·정치적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의 연합조직을 이루어 서방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 영국인 중국학자가 분명한 경고를 했다.
「맥파쿠할」교수 (이코노믹스지론고 1980)의 견해에 따라 근년에 미국메서 출판되어 꽤 많이 읽혔던 『동아시아의 우월점』 (호프하인츠·캘더공저 1982)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동아시아의 나라들이 여러가지 난점들을 지닌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하나의 지역통합을 구성해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동일문화권에 불구|공속감 이루지못해>
과연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그밖의 관련지역들이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할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허황된 꿈이 아니라 장래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망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단지 동아시아의 급속한 상승에 어떤 위압감 같은 것을 느끼는 서방사람들의 우려와 경계의 표현으로서 일종의 새로운 황화론이라고 보여지는 점이 과연 없겠는가.
현실적으로 이러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요인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정치 이념과 제도상으로 우선 자유·공산지역으로 갈라져있고 그 간격이 유럽의 서구·동구 사이의 간격보다도 훨씬 더 넓고 깊다는 것도 긴 설명이 필요없다. 「유럽공동체」도 서구의 국가들로만 구성되었지 동구는 또다른 통합체인「코메콘」으로 대립하고 있는 형편이니 동아시아에서 자유·공산의 장벽을 넘은 연합이 생각될 수 없음은 말할것 없다.
더구나 설령 이러한 정치이념의 차이가 없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동아시아는 역사·문화상으로도 통합체 구성을 어렵게하는 점들을 갖고있다. 첫째로 근세 여러세기동안 국가·민족들사이에서 평등한 관계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못하고 계층적 혹은 적대적 관계로 대립되어왔고 특히 19세기 중엽부터는 끊임없이 서로 충돌과 전쟁, 지배와 항거로 점철된 시기를 지나와서 아직도 국가끼리 허심탄회하게 평등한 상호관계를 닦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근세에 있어서 중국·한국·일본이 모두 쇄국하여 서로인적·물적인 교류를 갖지못해 왔다는 사실이다. 문자를 공유하고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이라하지만 국민의 차원에서 서로 여행·이주·교역한 적이 없었고 서로의 언어를 배워 의사를 소통 할 필요도 방편도 없었다. 중국인의 화교조차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는 나갔지만 한반도와 일본에선 사실상 발붙이지 못한 터였다.
이토록 인적·물적교류가 적었던 문화권은 아마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울 듯 하다 (유럽문화권·이슬람문화권·인도문화권·중남미지역등과 비교해서).
세째로는 근세 서구문화와의 접촉이래로 동아시아 각국은 서로의 연계의식이 희박해졌다는 점이다.
서로가 끊임없이 충돌했다는 이유도 있고 또 그보다도 각기가 구미의 이념과 제도, 그리고 산업과 기술을 도입하는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각국은 서양쪽을 바라볼 뿐 이웃과의 연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때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이른바 범아운동이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몇가지 양상으로 제창된 일도 있으나 이들은 본질적으로는 일본을 지도국으로해서 유럽열강세력을 아시아에서 몰아내자는 팽창주의 운동이었고 후일의 2차대전의 전쟁수행을 위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구상과 다를것이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문화상으로도 중·한·일의 나라들은 서로 격리된 관계속에서 공속감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런 전통은 현재까지도 은연중에 그대로 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니 역사 전통으로서도 연합체의 형성은 극히 어렵게 되어있다.
나라들이 지역적 연합체를 구성하는데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작용한다. 정치학자는 흔히 지리적 근접성, 사회문화적 동질성, 역사적으로 상호작용의 정도, 타방에 대한지견, 참여할때의 각자의 기능적이익, 그런 통합체가 갖게될 어떤 성격등등을 기준요인으로 열거한다.
만약 이런점으로 측정한다면 동아시아는 지역통합을 이룩하기에 충분한·요인들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있다.
그러나 나라관계가 수식처럼 단순치 않음은 물론이다. 지리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 동질적이고 역사상으로 상호작용이 깊고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들이 반드시 쉽게 통합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2차대전 이후 일어난 전쟁들을 검토분석한 한 연구는 서로 가까운 나라들이 폭력적 갈등을 유발시킬 확률이 다른 경우보다 두배이상 높았다는 결론을 내고있다.
남·북한의 분단과 중공·대만의 대립속에서 이 분단을 넘어서는 연합체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해서, 그렇다고 일본·한국·대만 등 동아시아의 자유진영만이라도 안전보장·경제협조 등을 위한 통합체를 만들겠다고 할 수도 없다. 일본은 중공과 국교를 갖기 위해서 대만과의 정치적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또 공산진영인 중공·북한·몽고 등이 어떠한 지역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필요성도 가능성도 역시 희박해 보인다.
결국 동아시아는 그 역사적·문화적 친근성에도 불구하고 가장 여러갈래로 갈라져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한·중·일 연합체 구성>
지역적 통합은 한 지역에 대한 공통적인 위협이 밀어닥칠 때에 가장 쉬운 계기를 얻는다. 「유렵공동체」라는 구상도 2차대전후 식민지를 잃고 움츠러진 유럽 각국이 결속해서 소련공산주의의 팽창에 대비하려는데 기본적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대서양기구라는 군사적기구가 먼저 생겨서 준비적 단계를 거친후에야 「경제적 공동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목적과 동기가 뚜렷하고 역사·문화적 기반이 튼튼한 유럽에서도 그 공동체는 그렇게 긴 준비단계를 거쳐서 구성되고서도 오늘날 휘청거리면서 나아가고 있고 연방국가로의 통합은 그저 긴 목표일 뿐이다.
여기에 비하면 「동남아 국가연합」(아세안)은 지역적인 경제, 문화협력기구로 겸허하게 출발했는데도 점차 성장해서 정치·군사적 안전보장의 성격까지 띠게되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갈라져 있는 동아시아에서는 어느 한쪽에 대한 외부적 위협은 딴쪽에 대한 위안이 될 수있는 상황이어서 지역전체로서의 어떤 공통적인 위협은 생겨나기 어렵다. 다만 소련 군사력의 급속한 진출은 이 지역 대부분에 위협이 되고 있다. 또 중공을 포함한 이지역의 경제성장에 대한 경계심에서 서방세계가 각종의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 거다란 공통적인 위협이 되어간다는 점이 없지않다.
이렇게 볼때에 언젠가는 우선경제적 차원에서의 연합체의 구성은 문제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분야로까지 점차로 넓혀져 갈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허다한 문제점들이 있다. 연합체속에서 구성국가의 평등권이 지켜질 수 있는 기구가 될 것인지 또는 어느 나라가 중추적역할을 하게될까 등의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또 밖으로는 외부지역으로부터의 분열작용이 가해질 것도 자명한 노릇이다.
남·북한이 통일이 된다면 한·중·일 세나라는 지역적으로 유력한 연합체를 구성할 수 있음에 톨림없다. 그러나 통일의 기약이 없을 바에는 넓은 지역적통합 (환태평양등)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동아시아연합의 구성에 참획하고 거꾸로 이를 통해서 우리의 통일을 지향하는 길을 모색함도 생각함직한 일이라 하겠다. <필자=전 서울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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