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초보 티 벗지 못했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 우승 소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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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물 만난 물고기들이 프로배구판을 뒤집었다. 빠르고 다양한 공격 루트로 무장한 현대캐피탈의 '스피드 배구'가 그동안 프로배구를 지배했던 '몰빵 배구'의 시대를 끝냈다.

현대캐피탈은 25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V-리그 6라운드 OK저축은행과의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0(25-20 25-16 25-22)으로 승리하며 16연승을 기록, 26승 8패(승점 75점)로 남은 2경기의 결과에 관계없이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16연승은 구단 역대 최다 연승이자 프로배구 한 시즌 최다 연승 신기록이다. 3라운드까지 4위에 그쳤던 현대캐피탈은 후반기 무서운 연승행진으로 2008-2009시즌 이후 7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올 시즌 수많은 어록을 만든 최태웅(40) 현대캐피탈 감독은 경기 전 선수들에게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일컫는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사자성어를 꺼냈다. 그는 "물이 코트라면 선수들은 물고기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코트라는 물에서 신나게 물장구치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마치 소풍가기 전날 같은 기분"이라던 최 감독은 이날 경기 내내 작전판을 들고 분주하게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경기 도중 위기에 빠졌을 때는 우승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에게 "쉽게 얻으려 하지말라"며 다독였다.

취미로 중학교 수학문제를 푸는 최태웅 감독은 코치도 거치지 않고 덜컥 감독이 된 초보다. 그러나 부드러운 리더십과 예리한 작전 구사로 선수(삼성화재 시절)와 감독으로 동시에 우승한 최초이자 V-리그 역대 최연소 우승 감독이 됐다. 다음은 최 감독과의 일문일답.

- 우승 소감은
"이제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것 같다. 우승도 연승도 내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경기 전까지 선수들이 해낼 수 있을지 반신반의 하는 생각이 남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마지막 세트에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는 걸 보고 마음이 편해졌다."

- 우승을 확정한 순간에 옆에 있던 송병일 코치를 껴안았다.
"팔을 벌리고 있길래 안아줬다.(웃음) 우승을 한지 오래되서 어떻게 해야할지 잊어버렸다. 지금도 어리둥절하다. 선수들은 한 명도 안기러 오지 않더라(웃음)"

- 전반기를 3연패로 마무리했지만 후반기 시작하면서부터 16연승을 달렸다.
"체력 관리가 잘 된 것 같다. 4~5라운드 일정이 빡빡했는데 체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블로킹도 점점 살아났다. 비시즌에 훈련한 것이 효과를 봤다. 계속 이기면서 선수들 간 신뢰와 믿음이 강해졌다"

- V-리그 사상 처음으로 선수와 감독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김호철, 신치용 감독님께 배운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게 생각이 난다. 하면서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때마다 코칭스태프와 미팅을 통해 배구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기준을 잡았고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 다음달 2일 삼성화재를 상대로 17연승에 도전한다.
"아직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외국인 선수(오레올)가 우승이 결정된 상태에서 힘을 내지 않을 거 같다. 나머지 국내 선수들은 모두 내보낼 예정이다. 연승보다는 '삼성화재와의 라이벌전'으로 기대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 정규리그 우승이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마지막에 윤봉우 플레잉코치를 넣었는데 현대캐피탈에서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선수들이 우승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지금 선수들이 우승을 했으니 앞으로 이 선수들이 현대캐피탈의 레전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 정규리그 우승에 있어 MVP를 꼽는다면.
"오늘은 단연 문성민이다. 문성민이 경기 초반 어려운 볼을 노련미로 잘 해결해줬다. 어린 선수들이 문성민을 믿고 따르는 모습이 보인다. 확실히 리더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 오레올을 영입한 것도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오레올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한국에서 실패한 용병이 맞다. 하지만 이번에 기회를 준다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인성이 된 선수라고 생각이 들어 마음에 들었다. 기대대로 잘 해줬다."

- 3세트 작전타임에서 선수들에게 '쉽게 얻으려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선수들이 우승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붕 떠있었다. .1~2세트를 따내면서 쉽게 가나 싶었는데, 선수들이 오버를 하더라. 누구나 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나 쉽게 얻으려고 하면 상대에게 뺏길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 이번 시즌 점수를 준다면.
"오늘은 30점이다. 기본적인 오더 작성에서 실수를 또 했다. 아직 초보는 초보인 것 같다. 하다보면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초보를 벗어나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생각나서 아직 점수를 주기 힘들 것 같다."

안산=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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