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두 배인 15년간 계속됐다. 1931년 가을, 일본이 동북을 점령했을 때부터 계산하면 그렇다. 전쟁의 전반부 6년이 동북3성에 국한된 국지전이라면 나머지 기간은 전면전이었다.
일본군은 동북 전역과 경제 중심지 상하이(上海), 수도 난징(南京), 교통의 요지 우한(武漢), 중남의 중심 창사(長沙), 남방 최대의 도시 광저우(廣州), 제국의 수도였던 베이핑(北平·현 베이징) 등을 점령했다. 충칭(重慶)만은 예외였다.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전쟁 초기부터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지구전을 염두에 뒀다. 든든한 후방이 있어야 지구전이 가능하다며 근거지를 물색했다. 군사가(軍事家)들의 주장도 별 차이가 없었다. “적이 방심했을 때 허를 치면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와의 전쟁은 몇 차례 전투로 끝나지 않는다. 중국은 큰 나라다. 오래 끌수록 유리하다. 전략이 중요하다. 쓰촨(四川)은 주변 지세가 험한 오지 중의 오지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노래처럼 새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지만, 일단 들어만 가면 입이 벌어진다. 옥야천리(沃野千里), 기름진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는 천혜의 땅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이곳으로 쫓겨온 덕에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고, 제갈량(諸葛亮)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충칭은 창장(長江)과 자링장(嘉陵江)이 합류하는, 묘한 곳이다. 삼면이 강이다 보니 반도나 다름없다. 산은 높고, 강은 길고,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사람들은 상인 기질이 농후하다. 전쟁도 상품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먼 옛날부터, 충칭 사람들은 뭐든지 상품화 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쓰촨인들에게조차 별종 취급을 받았다. 이를 조소하는 노래가 유전될 정도였다. “충칭에 가보니, 평지가 거의 없다. 산이 높고 길은 울퉁불퉁. 가난한 사람은 비웃어도 몸 파는 여인은 비웃는 법이 없다. 두 강의 물을 마셔서 그런가 보다,”
충칭이 전시수도가 되자 온 도시가 들썩거렸다. “행운이 제 발로 왔다”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던, 대규모 민족이동이 벌어졌다. 일본 점령지역의 정부기관·공장·교육시설과 난민들이 줄줄이 쓰촨으로 향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쓰촨으로 실어 날랐다. 일본 폭격기의 폭격 따위는 당하건 말건 상관치 않았다. 당시 중국 정부문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배와 항공기를 동원해 공병창 기계와 항공유·폭탄 등 19만6000t을 쓰촨으로 수송했다. 철강과 방직공장 607개에 딸린 기술자도 1만2000명을 상회했다. 일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윈난(雲南)과 구이저우(貴州)에도 분산시켰지만, 규모는 쓰촨에 비할 바가 못됐다.”
이전 과정에서 입은 피해도 컸다. 대공보(大公報)에 실린 기사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중국 실업계의 ‘덩케르트 철수’였다. 전국에 등록된 공장이 3849개였다. 33%에 해당하는 1279개가 창장을 타고 이동했다. 일본 폭격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긴장감은 영국군의 덩케르트 철수 때보다 더했다. 40일간 대형 선박 16척이 침몰하고, 116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 덕에 충칭과 쓰촨 각 지역에 새로운 공업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 간부 5000명과 정부기관, 700개의 광산기업과 기술자 1만여 명의 이주가 끝나고, 48개 교육기관과 학생 2만여 명, 국보 1만6658상자가 쓰촨 경내에 들어오자 장제스는 안도했다. 38년 12월 8일, 중앙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이전시켰다. 우한에서 일본군의 포성을 뒤로한 지 47일째 되는 날이었다. 충칭에 안착한 장제스는 성명을 발표했다. “18개 성(省) 중 15개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도 쓰촨과 구이저우· 윈난 3개 성만 장악하면 어떤 적이건 때려 눕히고 실지(失地)를 수복할 수 있다.”
충칭은 국가의 위기에 중임을 떠맡았다. 중국의 정치·군사·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일본군이 가장 노리는 도시도 충칭으로 변했다. “3개월이면 중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던 일본은 전략을 수정했다. 땅이나 강을 통한 접근은 불가능했지만,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38년 12월 말, 충칭 상공에 일본 폭격기가 출현했다. 중심가에 포탄을 투하하고 사라졌다.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43년 8월까지 계속된 일본의 충칭 공습은 무지막지했다. 5년간 218차례, 총 9513대가 출격해 폭탄 2만1593발을 쏟아 부었다. 40년 8월 19일 공습 현장을 지켜본 미국 기자가 기록을 남겼다. “평온한 거리에 예리한 경보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높은 지역마다 홍색 등이 솟아 올랐다. 충칭 시민들은 방공 경험이 풍부했다. 등을 발견하자마자 부두로 달려갔다. 초조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일본 공습기는 특징이 있었다.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그날 하루 동안 134대가 날아와 폭탄 262발과 소이탄 52발을 투하했다. 공습은 이후 3일간이나 계속됐다.” <계속>
김명호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