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주문에 늘어난 메뉴 … 팔도의 맛 집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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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호 28면

남원 국밥. 고기 한점 없는 국밥이지만 그 맛이 깊고 개운하다. 목포에서 직접 구입해 온다는 반건 민어구이와 함께하면 금상 첨화다.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는다’더니 꼭 그런 격이었다. 인사동에서 북촌을 가던 길이었다. 날씨도 쌀쌀하고 속도 달랠 겸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던 참이었는데 ‘국밥’이라고 써 놓은 메뉴에 이끌려 식당 한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사동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옥 스타일의 작은 식당이다. 막 들어서는데 눈에 익숙한 글씨의 서예 작품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낙관을 자세히 보니 고 취운 진학종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우리나라 초서의 마지막 대가로 꼽히던 최고의 명필 작품을 국밥집에서 만나다니….


어라? 하는 마음으로 내부를 둘러보는데 고 중광 스님의 그림이 또 보였다.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선화(禪畵)로 유명했던 분이다. 흐흠… 하면서 자리에 앉아 메뉴를 펼치는데 이번에는 고 천상병 시인이 이곳에서 육필로 썼다는 시가 보인다. 한마디로 대단한 곳이었다. 지금이야 관광객들 판이지만 예전의 인사동은 문화·예술인이 붐비는 곳이었다. 그들의 둥지 역할을 하던 내력 있고 깊이 있는 식당들이 꽤 있었는데 이제는 다들 어디로 갔는지 잘 볼 수가 없었다. 그런 곳을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남원: 서울시 종로구 재동 49-3 전화 02-766-6775 일요일은 쉰다. 남원국밥 8000원. 국밥 외에 팔도의 음식이 다있는데 모두 맛이 깊다. 예약을 반드시 하는 것이 좋다.

헌법재판소 앞 재동에 있는 이곳은 ‘남원’이라는 곳이다. 원래 인사동에 있다가 옮겨 왔다고 한다. 1989년에 소미선(52) 대표가 개업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기업인, 정치인, 문화예술인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고 소 대표는 말한다. 이곳에 있는 예술 작품들은 모두 그 분들이 선물로 준 것들이었다. 전시회를 하고 여기서 뒤풀이를 했는데 돈이 없어 대신 작품을 놓고 간 예술가들도 많았다. 당시에는 외상 문화도 있었고 그 정도쯤은 눈감아주던 낭만이 있었던 시절 얘기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는 절창으로 시작하는 시 ‘귀천’으로 유명한 고 천상병 시인과는 더욱 특별한 친분이 있었다. 인사동 시절, 부인인 고 목순옥씨가 그 시 제목을 걸고 운영하던 카페가 바로 옆에 있었다. 천 시인은 그 카페에 나올 때면 이곳 ‘남원’에 들러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를 한 잔씩 하곤 했다. 지금 메뉴판에 넣어 놓은 ‘달빛’이라는 시는 이곳에서 식사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써 주신 시라고 한다.


천 시인이 단골로 다니다 보니 그 분과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많았다. 이분은 특이하게도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천원만 꿔달라”고 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단다. 천 시인이 자신의 시를 좋아하는 팬들과 함께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방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유명 가수가 친구들하고 왔다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시작했는데 천 시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그쪽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때 천 시인이 소 대표를 부르더니 천원만 꿔달라고 했다. 천원을 받아 들더니 그때까지 남아있던 마지막 한 분에게 쥐여주면서 가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다. 아이처럼 천진하고 순수했던 시인의 면모가 남아있는 일화다.


이곳에 이렇게 유명인,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던 것은 소 대표의 후덕한 마음씨와 친화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국밥이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인사동 거리를 좋아하고 옛 물건들을 수집하기 좋아하던 소 대표는 인사동에 자리를 잡으려고 작은 식당을 시작했다. 그때 선택한 메뉴가 어릴 적부터 집에서 먹던 국밥이었다. 전라북도 남원이 고향인 소 대표의 집에서 할머니가 아버지를 위해 끓여주시던 해장국이다.


이곳 국밥은 사골 국물에 된장을 풀고 우거지를 넣어서 끓여낸 것이 전부이지만 그 맛은 간단치가 않다. 국물 맛이 개운하고 깊어서 한번 떠 넣기 시작하면 코를 박게 되는 대단한 매력이 있다. 지금은 국밥 외에도 메뉴가 많이 늘어났는데 특이하게도 전국 각지의 음식이 모두 다 있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단골로 다니던 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고향 음식을 해달라고 해서 하나씩 해주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팔도 예술인의 사랑방다운 얘기다.


천 시인이 써준 ‘달빛’은 지금까지 발표된 적이 없다고 한다. 원고지에 한 자씩 정성스럽게 써 놓은 시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이 곧 ‘귀천’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분이 ‘하늘로 돌아간’ 것이 1993년이니 그 얼마 전이다. 그 시를 읽으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술이 술술 들어간다. 이렇게 시와 예술이 안주가 되는 곳, 바로 ‘남원’이다. ●


주영욱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대표. yeongjy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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