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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임죄의 배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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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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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수
사회부문 부장

2002년 5월 일본 외무성 직원 사토 마사루(佐藤優)가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됐을 때 적용 혐의는 ‘3300만 엔 배임’(일본 형법 247조, 한국은 형법 355조 2항)이었다. 소위 ‘국책 수사’의 하나였다. 검찰이 사토 주변을 파고 또 팠지만 돈이 오간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사토에겐 ‘외무성의 라스푸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졸지에 매국노가 됐다. 512일간 수감됐던 그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서야 풀려났다. 사토의 검찰 체험을 담은 만화가 ‘우국의 라스푸틴’이다. 여기엔 검사가 취조 과정에서 사토에게 배임죄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 상사가 아픈 동료를 위한 약을 사오라고 돈을 줬는데 엉뚱하게 햄버거를 사왔다. 그게 배임이야. 돈을 가로채면 횡령이고. 자, 형량이 무거운 횡령죄는 추궁 안 할 테니 배임을 시인하는 게 어때?”

 어디선가 본 듯, 낯익은 풍경이다. 똑같은 일은 한국에서 더 자주 벌어진다. 가장 최근 사례는 통영함 장비 납품 과정에서 평가보고서 허위 작성을 지시한 혐의(특경가법상 배임)로 구속기소됐던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에 대한 무죄 판결이다. 재판부는 “부정한 청탁의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토의 경우처럼 돈이 오간 흔적도 없었다.

 고희(古稀)의 이석채 전 KT 회장도 103억원 배임 등 혐의에 대해 지난달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고발은 참여연대가 했지만 수사 착수는 연임을 앞둔 시점에 이뤄졌다. 그는 수사 도중 사직했다. 그 후 1년6개월 만에 배임의 고의가 없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장 연임을 위해 회사에 1800억원대의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를 받았던 정연주 전 KBS 사장도 3년 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로 마무리됐다.

 배임죄가 있는 나라는 한국·일본·독일 정도다. 일본과 독일은 고의성·목적성이 있어야 처벌한다. 반면 한국은 1953년 배임죄 도입 시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규정, 처벌 범위가 광범위하다. 사업에 실패한 기업인은 모두가 배임의 잠재적 피의자라는 것이다. 전·현직 검사의 다음 대화를 음미해보자.

 A: 20여 년 전 어느 날 교통사고 피의자의 영장을 기각하니깐 수사관이 저녁 때 봉투를 들고 와서 좀 쓰시죠 하더라. 이게 뭐냐고 물으니 ‘관행’이라고 했다.

 B: 당시 교통사고는 전치 3주 이상이면 구속이었다. 그걸로 검사들이 술 무진장 마셨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엄히 처벌하는 특례법이 생기면서 확 줄었다. 검사의 세계에서 엄청난 변화였다. 그 다음엔 배임, 사기가 교통사고 사건 역할을 했다. 이사회의 결정을 거치지 않으면 대개 배임 처벌이 가능했다. 배임은 검찰이 기업을 지배할 수 있는 야만적인 법률이다. 지금도 사실 배임이 없으면 하명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건가.

 대기업 총수의 방만한 경영을 제어할 수단으로서 배임죄는 존재의 필요성이 있다. 다만 위정자들이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데 악용·남용되도록 놔둬선 안 된다. ‘배임죄의 배임’을 감시하고 또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조강수 사회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