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나의 억울, 너의 억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기사 이미지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최근 개인적으로 조금 억울한 일이 있었다. 올해 2월 중앙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어쩌다 어른』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한 케이블 채널에서 9월부터 같은 제목의 방송을 시작했다는 사연이다. 알아보니 제목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데다(제호는 사상과 감정의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 “방송 타이틀을 정하고 확인해보니, 같은 제목의 책이 있더군요”라는 PD의 사전 연락도 있었기에 문제 삼을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프로그램 제목 참 잘 지었네요” 같은 시청자 평을 읽을 때마다 ‘저거 원래 내 건데’라는 억울함이 스멀스멀 들이찼다. 자초지종을 묻는 선배에게 “나, 뭔가 억울해”라고 메시지를 보내니 뜬금없는 답이 돌아온다. “음, 약자들의 억울함이 충만한 곳 여기는 헬조선.”

 안다. 난 약자가 아니다. 이렇게 나 속상해요, 글로 털어놓고 있는 이 상황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남들 보기엔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는 이 사건을 겪으며 억울함이라는 감정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됐다. 분노와는 다르고, 슬픔과도 다른 어떤 감정.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또는 그런 심정”을 뜻한다고 적혀 있다. 내 잘못이 아닌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분함, 그런데 어디 호소할 곳이 없는 답답함. 억울함은 화병의 근원이기도 하다.

 억울함에 눈을 뜨니 주변에 크고 작은 억울이 넘쳐난다. 연휴 전 들른 집 근처 식당 주인은 건물주의 퇴거 명령으로 다음달까지만 영업한다며 한숨을 여러 차례 내쉬었다. “주인이 갑이니 무슨 방법이 있겠어. 근데 열심히 장사해서 건물값 올려준 건 난데 열불이 나네.” 결혼 후 첫 명절을 시댁에서 보내고 온 친구는 “노예체험 완료. 잘 끝냈는데 왠지 억울함”이란 메시지를 웃음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왔다. 추석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합동차례를 지내고 진상규명을 촉구한 세월호 유가족들의 마음엔 상상조차 힘든 거대한 억울함이 자리 잡고 있을 터. 불합리한 걸 알지만 함께 해결을 고민하지 않는 사회, 그래서 하소연할 곳을 잃은 억울한 을들만 넘쳐나는 사회는 병이 깊다.

 출근길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말하니 기사님이 묻는다. “기자세요?” 이어질 레퍼토리는 예측 가능하다. 정치 비판, 아니면 “내가 뉴스거리가 있는데”로 시작하는 억울한 사연이다. 이번엔 후자였다. 다니던 운수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택시를 시작했는데 퇴직금을 제대로 정산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 네네”로 적당히 장단을 맞추었을 것을, 웬 일인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열심히 듣는다. “혼자 떠들어 미안한데, 억울한 일 들어주는 게 기자들 일이잖수”라는 말에 명함까지 건네고 택시에서 내렸다. 이렇듯 억울함의 연대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 작은 억울 체험에 감사해야 할지도.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