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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하게 죽기 바라는 영웅의 여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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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호 14면

한 권의 책이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레이코가 와타나베를 향해 이상한 말투를 쓴다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닌지”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 ‘컨스피러시’(1997)에서는 집에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쌓아 놓는 멜 깁슨이 나오는데, 그는 이 책이 음모를 전파한다고 믿는 편집증적 캐릭터다. 역사의 스캔들로 남아 있는 장면 하나는 존 레넌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이 이 책을 지니고 있던 모습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호밀밭의 파수꾼』과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20세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6>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1919~2010)가 이 책을 완성한 것은 1950년 가을이다. 그는 원고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펼쳐지던 해안에서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다듬어 완성한 원고를 샐린저는 주변 편집자들에게 발송한다. 미국 하코트브레이스앤컴퍼니의 편집자 로버트 지로는 작품에 수긍하지 못했다. 영국 출판사 해미시해밀턴 대표 제이미 해밀턴도 “샐린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에서는 엄청난 재능이 느껴지고 이야기 자체도 아주 재미있지만, 미국 청소년의 은어가 영국 독자들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해밀턴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이 책을 출간한다. 미국에서는 리틀브라운앤컴퍼니의 편집자에게 새롭게 전달되어 출간됐다. 샐린저는 요구가 많았다. 미국 출판사에는 사전에 홍보용 책자를 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뒤표지에 실린 작가 사진은 빼 달라고 요청했다. 영미권은 물론이고, 국내 판본에도 책표지에 사진이나 이미지가 없는 것은 그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51년 7월 16일 마침내 미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소설은 출간 직후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7개월 동안 머물렀다.

허위와 기만에 찬 중산층을 향한 혐오
작품은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영어를 제외한 네 과목에서 모두 낙제하여 퇴학을 당한 후(벌써 네 번째다!) 겪는 2박 3일 동안의 일을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다. 변호사 아버지에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시나리오 작가를 형으로 둔 이 부유층 자제의 불만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에 미쳐 있다고. 조금이라도 긁힐까 봐 걱정하지를 않나, 모이기만 하면 1갤런으로 몇 마일이나 달릴 수 있나 하는 얘기들을 하지. 새 차를 사 놓고도 금세 새로 나온 차를 갖고 싶어하고 말이야. 난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아. 관심조차 없지. 자동차보다는 차라리 말을 갖고 싶어. 말은 적어도 인간적이잖아.”

차보다 말을 선호하는 홀든의 태도에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중산층 계급과 기성세대를 향한 혐오가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홀든에게 유일한 희망이 하나 있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켜 주고 싶은 여동생 피비에게 자신의 꿈이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라고 말한다.

‘뉴요커’의 담당 편집자 윌리엄 맥스웰의 아내 에밀리와 함께 서 있는 샐린저. 이곳은 샐린저가 평생 은둔하며 지낸 뉴햄프셔주 코니시 부근이다. 사진 민음사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순수성의 열망이라고 해야 할 홀든의 태도를 두고 시답지 않다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그토록 반향을 일으킨 것은 홀든의 여정을 통해 우리가 지나가야 하는 길이 조목조목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홀든이 찾아갔던 앤톨리 선생은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홀든의 여정은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영웅의 여정이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에 여동생 피비를 위해 서부로 향하는 발길을 접는 모습은 그가 성숙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앤톨리 선생이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성숙이란 여행을 해본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가 보지 않는 자는 묵묵히 살아가는 데 답답함만을 느낄 것이다. 홀든은 가 본 자이기에 성숙의 길도 선택할 수가 있다.

은둔 생활로 작품 지킨 ‘파수꾼’
샐린저 또한 묵묵히 살아가는 것을 원했다. 그는 65년 이후로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80년 이후로는 인터뷰조차 응하지 않았다. 함께한 사람들은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출간 이후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클레어 더글라스와의 결혼이었다. 55년 2월 17일, 두 사람은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이 보는 앞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열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았다. 샐린저는 이러한 결혼 생활과 집필 생활을 동양 종교의 자장 속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딸 마거릿 앤을 낳았음에도, 67년 클레어와 이혼하게 된다. 그사이 샐린저는 꾸준히 글을 썼다. 『프레니와 주이』(1960),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들어라』(1963)와 같은 소설들이 이때 나왔다.

그러나 샐린저의 삶은 점점 더 세상과 단절되어 갔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건은 전기 출간에 대한 소송이었다. 86년 10월 10일, 샐린저의 전기를 출간하려던 영국 작가 이언 해밀턴에 대한 소송의 승리를 통해 샐린저는 자신에 대한 과거를 지워 버렸다.

여기에 대한 비난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은둔이 지켜낸 것은 바로 그의 작품들이다. 비록 홀든처럼 살지는 못해도 그의 언어와 작품이 침묵함으로써 『호밀밭의 파수꾼』은 세상의 신비로 지켜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 점이 샐린저의 가장 위대한 측면인지도 모른다. 창조자의 베일이 벗겨진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은 오랫동안 음미되지 못할 수도 있을 터다. 그는 작품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하고,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진행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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