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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걸린 북 시티 갈길 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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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에서 임진각 방면으로 자유로를 따라 가다보면 행주대교 기점 17km 지점 부근에서 한적하던 풍경이 갑자기 요란해진 느낌을 받는다.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하얀색 바탕에 까만 글씨의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서 있다. 이미 완공한 건물이 간간이 눈에 띄지만 뼈대만 겨우 세워지거나 여기저기서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일대 약 48만평의 땅에 1조원을 투자한 이 곳이 파주출판단지다. 출판사 뿐 아니라 인쇄.유통.제본사 등이 한 곳에 모여 협업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여 문화거점 도시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있다.

특히 이 곳을 별칭으로 '파주북시티'라해서 '도시'로 부르는 것은 효율성과 기능성만 앞세운, 삭막한 느낌의 종래의 산업단지 성격을 탈피해 단지 전체를 환경친화적으로 만들려는 구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현재 파주에는 한길사.동그라미 교육 등 출판사 두 곳, 보진재.화성프린원 등 인쇄사 7곳, 서울지류유통 등 출판유통사 3곳 등 모두 12개사가 입주를 마쳤다.

1989년 이기웅(출판사 열화당 대표) 씨 등이 주축이 돼 사업을 추진한 이래 우여곡절 끝에 15년만에 단지가 제모양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 구상대로 진행될지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단지가 활성화되려면 출판사가 대거 옮겨와야 하는데 이들의 움직임이 더디다. 애초에 지난해 연말까지 많은 회원사가 입주하기로 돼 있었으나 아직 공사를 마치지 못한 곳도 많다. 출판사가 파주단지에 입주하면 5년간 법인세가 면제되고 그 다음 5년간은 50%만 내도록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단지가 너무 외진 데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많은 출판사들이 입주를 꺼리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사업추진위측에서는 일단 메이저출판사의 입주를 종용하고 있다.

현재 입주가 예정된 출판사로는 창작과비평사와 민음사가 있다. 창작과비평사는 이달 말께 이사할 계획이다. 현재 세들어 지내는 마포 주위에 유흥업소가 많아 분위기가 어수선해 파주 입주를 서둘렀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이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던 터라 직원들도 일산 등지로 대부분 이사간 상태라고 한다.

따라서 파주로의 이전 때문에 직원들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편집위원이나 기획위원들의 거주지가 대개 서울이라 편집회의나 기획회의를 열기 위해 서울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야 할 지 고민 중이다.

현재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민음사는 8월말에서 9월말 사이에 파주로 옮길 계획이다. 그러나 필자들을 자주 접촉해야 하는 편집부는 아직 옮길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이전을 하더라도 민음사만 해당이 되고 자회사인 비룡소나 황금가지는 현 건물에 남을 것이라고 한다. 법인세 면제 혜택이 건물 소유 법인인 민음사에만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음사 관계자는 "가기로 하긴 했지만 여러가지 애로가 많다"고 털어놨다. 인적 네트워크나 문화 네트워크 중심이 서울이기 때문에 멀리 갈수록 불리하다는 것. 게다가 법인세 혜택을 감안하더라도 교통비나 책 운송료 등이 훨씬 비싸지기 때문에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출판 기획이란 트렌드를 빨리 감지해야 하는데 문화적으로 소외된 곳에서는 제약이 있다.

입주는커녕 아직 설계를 마치지 않았거나 설계를 끝냈더라도 착공을 하지 않은 출판사가 45개사에 이른다. 출판사 동녘 대표로 건설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건복씨는"도시가 완성될 때까지 관망하거나 다른 회사가 하는 것을 보고 착공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의 약속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출판사의 입주율 저조로 대중교통을 확보하고 기본 시설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놨다.

친환경적인 출판도시를 만들자는 의도가 얼마나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반성이 일고 있다. 지난 3일 파주단지내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는 '다시 파주북시티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북런던대 플로리안 베이겔 교수는 "파주출판도시는 갈대밭과 도시구조가 공존하는 습지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 당초 구상이었다"면서 "그러나 녹지통로를 확보하는 데 일부 실패한 것 같고 일부 빌딩은 주변 환경과 관계성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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