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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우리도 헌법대로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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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 버지니아주의 조그만 마을 몽펠리어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좋다. 조금 떨어진 샬럿빌이 버지니아대학.몬티첼로를 위시한 토머스 제퍼슨의 거창한 도시라면 이곳은 제임스 매디슨의 저택이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산책길이 나 있는 뒤편의 숲과 유럽식 정원 등이 저택의 품위를 더하고 있지만,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매디슨이 살았던 곳이라 많은 사람이 방문한다.

1787년에 개최된 미국 헌법제정회의에서 풍부한 지식과 비전, 그리고 탁월한 능력으로 그 복잡하고 의견분분한 많은 논의를 종합해가며 최초의 근대국가 헌법인 미국 헌법의 기본틀을 디자인한 당사자다. 서른 중반 때의 일이다.

*** 미국인들의 공동체 운영 방식

대학을 마친 후 25세 때 버지니아권리선언의 초안 작성에 조력한 그는 3대 제퍼슨 대통령 때 8년간의 국무장관을 거쳐 4대 대통령이 돼 8년 동안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세계 헌법재판의 시초가 된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의 그 매디슨이기도 하다.

헌법 전공자인 나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러보곤 하지만, 내가 주시하는 것은 도대체 그에게 '헌법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붙여놓고 그를 포함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신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대대손손 교육해가는 미국인들의 무서운 공동체 운영 방식이다.

지금까지 미국 역사학계의 중심 주제도 간단히 말하면 '건국의 아버지'의 정신이 무엇이냐를 밝히고 설명하는 것이고,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에서도 이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한 정신과 구상, 즉 미국이 어떤 나라며, 또 어떤 나라이어야 하는가를 밝히고 설명하는 것이 그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대다수 헌법과 헌법 이론들을 보면 결국 이들의 논의에서 나온 성과물들을 각자 수입하거나 곁눈질해 자기 것으로 변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전쟁.대(對)멕시코전쟁.남북전쟁 등 여러 전쟁도 치르고 복잡한 이해관계로 갈등이 있고 온갖 인간들이 날마다 일을 저질러오고 있음에도 오랫동안 법과 질서라는 규범질서 속에서 안정된 나라를 만들어 온 비법이 과연 무엇일까.

미국에 머물러본 사람이라면 미국인들이 그들의 헌법을 신앙처럼 여기고 이 헌법이 만든 자기 나라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에 놀란다. 교과서에서조차 미국인들은 헌법을 신앙처럼 신봉한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헌법을 위반한 경우에는 용서가 없다. 대통령도 쫓겨난다. 워터게이트사건이 그렇고 빌 클린턴의 경우도 그랬다. '감히 헌법을 위반하다니!' 이것이 미국을 지켜가는 가장 중심된 자리의 철심(鐵心)이다.

한국을 본다. '한국에는 모든 법 위에 떼법이 있다'는 자조적인 말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떼를 지어 죽기살기로 밀어붙이면 법이 무슨 소용이냐는 의미다.

그러고는 모두들 우격다짐으로 자기 이익부터 챙겨넣고, 남이야 어찌되든 나부터 살고 보자고 한다. 여기에는 대화나 타협은 전설 같은 이야기고 민주주의는 허울좋게 내건 말의 성찬일 뿐이다.

*** 권력 부패가 집단이기주의로

사실 사회 내의 이기주의는 공동체 내의 공공성의 붕괴와 공권력의 부패와 맞물려 있다. 우리 사회의 집단이기주의와 행동주의는 한국 지성의 패배이기도 하지만, 그간 국가권력을 잡은 자들이 자행한 부정과 부패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위로부터의 법과 질서의 붕괴는 당연히 아래에서의 법의 실패를 불러온다. 부패를 청산하고 공권력이 헌법과 법에 따라 정의롭게 행사돼야 국가의 권위를 확립하고 사회 갈등을 조정할 수 있으며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다가오는 제헌절을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우리 손으로 만든 헌법을 한번 읽어 보자. 헌법은 우리가 한 약속이고 그렇게 살기로 한 국민의 합의다. 헌법대로 권력을 행사하고, 헌법에 있는 '더불어 같이 사는 지혜'를 체화해보자. 그래서 우리도 '헌법대로 하자'고 하는 시대를 만들어보자.

정종섭 서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