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구와 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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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신문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시비가운데 아직도 결논에 이르지 못한 주제가 있다. 신문의 사명과 책임에 관한 논란이다 .그 결론은 「신문다운 신문」이 남아 있는 한 영원히 유보될지도 모른다.
신문의 공임을 묻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인민의, 인민에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 를 웅변했던 「A·링컨」의 얘기다.
하루는 「링컨」자신이 그의 좌주관에게 물었다.
『당나귀의 꼬리를 다리로 치면 당나귀의 발은 모두 몇개인가?』보좌관은 섕생할 여지도 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다섯개지요, 각하!』「링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말에 응답했다.
『틀렸네. 그렇게 말한다고 당나귀 다리가 다섯이 되겠나?』
만일 권력의 핵심에서 당나귀 다리가 다섯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신문은 마땅히 「네개의 다리」와 「한개의 꼬리」를 밝혀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동난중 미국에서 유명한 오보사건이 있었다. 「트루먼」대통경과의 기자회견때 『미국은 긴급한 경우엔 원자탄의 사용을 언제나 고려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사실을 어느 기자가 『언제나』라는 단어를 빼놓고 보도했다. 전세계가 긴장했다.
영국의 「애틀리」수상은 「트루먼」의 진의를 캐묻기 위해 워싱턴으로 긴급히 날아가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신문의 책임만을 주장하는 것은 자주 그 보도의 원천이 되는 권력자의 책임을 간과해 버리기 쉽다.
주나라 마지막 왕인 여왕(여왕)의 고사는 아직도 그 교훈이 생생하다. 그는 「사나울 여」 자가 시사하듯 백성을 학대하는 폭악무도한 임금으로 역사에 전하는 인물이다. 그는 재임중 수 많은 밀정을 풀어 자신을 헐뜯고 욕하는 백성들을 닥치는데로 잡아들여 처형했다. 천하는 조용해질 수 밖에.
이 때 한 용기 있는 신하가 간한말이 있었다.
-방민지구 심우방천. 백성의 입을 막아 비롯되는 해는 강물의 범람을 막는 것 보다 더 심하다는 뜻이다. 강둑이 무너지면 걷잡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다.
민지구는 권력자에게는 필경 부담스럽고, 귀에 거슬리고, 자존심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다.「정치권력」이란 민주정치에서도 불가피하게 인정되는 것이지만, 국민의 편에서는 행복이나 권익보다는 해가 많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고 장담했던「T·제퍼슨」(미3대 대통령)마저도 집권 7년 뒤엔 20년전에 했던 그 말을 뒤집었다. 『신문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은 신문을 읽는 사람들 보다도 세상물정을 더 잘안다.』 그는 신문의 보도를 『거짓과 잘못』투성이라 독단하고 있었다.
신문과 권력의 관계는 때와 장소를 추월해 오늘도 대충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논다. 언론자유의 량과 질에 상관 없이 기본 시각에서 그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언론스스로의 결론은 그 언론을 흘겨보거나 이용하려는 측의 결론보다는 훨씬 합리적이고 명쾌하며 필수적이다. 지난해 11윌7일자 미시사주간지 타임은 임시 증간호를 내며 주필 「헨리·A·그룬월드」의 명문을 실었다. 그 글 가운데 이런 경구가 들어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판단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 객관성은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도, 있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대신 우리는 공정과 균형을 추구한다.
언론은 잠자코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위대한 미덕이고 위대한 책임이다. 지체 없이 말하고 말해야 한다. 의혹의 반향, 승리의 외침, 공포의 징후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은.
7일 제28회 「신문의 날」을 보내는 우리의 소감도 다를바 없다. 신문의 책임과 사명은 끊임 없는 논란속에서 오히려 그 값어치의 빛남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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