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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밝혀진 '왕따 자살' … 유서에 피맺힌 절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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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사람 좀 괴롭히지 마라…내가 귀신이 돼서라도 너희 가만두지 않겠다." 3년 전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진 한 중학생의 자살 이유가 집단 따돌림(왕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황모(50)씨는 자살한 큰 아들(당시 15세, 중학 2년)의 유서(사진)를 13일 공개하면서 "다시는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군은 2002년 4월 19일 오후 5시쯤 마산시 자산동 아파트 18층 자신의 방 창문에서 뛰어내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일주일 만에 숨졌다. 경찰은 당시 유족들의 진술로 미뤄 앞니가 많이 튀어나왔던 황군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투신한 단순 자살 사건으로 결론 지었다.

황군의 부모들은 경찰 수사가 끝난 뒤 황군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책 속에 있던 유서를 발견했으나 경찰에 제출하지 않았다. 황씨는 "당시 아들을 뒤따라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또다시 시끄럽게 하면 더 괴로울 것 같았고, 아내가 극구 말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서를 공개하기로 결심한 것은 요즘 학교폭력이 사회문제화하면서 죽은 아들이 자주 꿈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A4용지 두 장에 연필로 쓴 유서에서 황군은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들의 이름을 맨 앞에 거론하며 '나를 놀리는 인간들, 내가 너희들 찔러 죽이려다 참았다. 남의 샤프를 훔쳐가 지꺼(자기 것)라고 우기고… 잠을 자는데 입에다 먼지 묻은 과자를 쳐 넣고…힘 좀 세다고…'라며 이들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가족 앞으로 남긴 다른 유서에는 '엄마 아빠 나쁜 짓만 해서 죄송해요. 돈을 안 훔치려고 해도 자꾸만 돈으로 친구들 사주고 싶고, 먹고 싶은 거 주고 싶어서…'라며 괴롭히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돈을 훔친 사연을 적었다.

황씨는 "이제 유서를 보니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돈을 훔쳐간 것을 알게 됐다. 도벽이 있는 줄 알고 아들을 심하게 나무란 게 너무 가슴 아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황군은 남동생(당시 12세)에게도 애틋한 마음을 남겼다. 유서 끝 부분에 '형아가 나쁜 짓 한 거 따라하지 말아라. 너를 때리고 착한 형이 못 돼 미안하다'고 적었다.

"도벽이나 동생구타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일 때 깊은 대화라도 나눴더라면 이렇게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황군은 명랑한 편이었으며 성적도 상위권이어서 부모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황씨는 "가해 학생의 장래를 걱정하느라 많이 망설였다. 그들의 처벌은 원하지 않는다. 사건 진상을 제대로 밝혀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황씨는 경찰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곧 내기로 했다.

마산=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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