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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서 아버지가 사라지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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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서 아버지가 사라지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의 눈에 띄는 경향은 아버지가 없거나, 부성보다는 모성이 가정의 수호자로 제시된 영화, 모계중심적 가정상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극중 아버지의 부재는 실제 한국사회 가부장적 질서의 균열, 부권상실이나 신모계화와 맞물리는 현상. 특히 '현대사영화'의 물꼬를 튼 '태극기 휘날리며'이후 대중영화의 한 지류를 형성한 70년-80년대 배경 가족영화들에서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탈역사적 상상력의 충무로 영화들이 과거 일상을 통한 역사의 재구성에서 집중적으로 아버지를 배제시키고 있다는 것. 이는 현 한국영화산업의 주체인 386세대감독들의 '아버지 부정하기'라는 세대인식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성장영화 '사랑해 말순씨'(박흥식 감독)에서 주인공 소년(이재응)의 가정은 화장품 외판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억척스러운 엄마(문소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80년대의 폭압적 세태상이 뒷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에서 '사우디로 돈벌러간 아버지'는 끝내 한번도 출연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있지만 없는, 가족에게 잊혀진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폐결핵으로 세상을 뜬 엄마와 소년의 첫사랑인 옆집누나,동네 장애소년 등이 한데 어울려 즐겁게 노니는 장면을 환상처럼 떠올리는 엔딩의 판타지 장면에도 '당연히' 아버지는 없다.

옆집 미혼모를 짝사랑하는 13세 소년이 어느날 성인의 몸을 갖게 된다는 '소년, 천국에 가다'(윤태용감독)의 소년은 미혼모의 아들로, 장래희망이 미혼모와 결혼하기다. 역시 80년대 배경의 이 영화에서 소년은 죽음의 문턱에서 성인(박해일)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자신을 소년의 아버지라 속이며 옆집 미혼모(염정아)와 데이트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중반부 영화가 본격적인 판타지로 넘어가면서 '천국의 사도'로 나와 소년의 데이트를 도와준다.

탈역사화된 일상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두 영화에서 아버지들은 모두 돈벌러 갔거나 ('사랑해 말순씨') 민주화투쟁을 하러가('소년, 천국에 가다) 부재한다. 이런 가장의 부재에 가족들은 별다른 결핍감을 느끼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혹은 또다른 미혼모)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것이 공통점. 이런 경향은 아버지가 없고, 장남이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장남 콤플렉스를 소재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형' 등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복고영화들이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아버지를 배제시키는 것과 함께 눈에 띄는 또다른 경향은 강렬한 모성영화들의 회귀다. 2003년 '바람난 가족''4인용식탁' 등에서 모성신화를 깨는데 적극적이었던 충무로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아이 유괴살해를 소재로 한 '친절한 금자씨'나 '오로라 공주'의 경우, 복수극의 주체는 엄마다. 가정의 적극적인 수호자로 아버지 아닌, 강인한 엄마가 제시되고 있는 것. '오로라공주'(방은진 감독)의 경우 아버지는 공적 질서의 수호자인 형사로 법망 밖에 있는 죄에 대해 사적 처단의지가 없는 반면 엄마는 사회적 룰을 깨며 잔혹한 복수행각에 나선다. 목사가 되기를 꿈꾸었던 남편은 아내의 복수극 이후 형사와 목사의 길을 다 포기하고 그에 동참한다.

그외 올 최고 흥행작인 '웰컴 투 동막골'이나 '말아톤'도 탈가부장, 모성중심적 색채가 강한 영화들. '웰컴 투 동막골'은 마을사람 모두가 위아래없이 아이처럼 살아가는 수평적 질서의 유토피아에서 가부장의 상징인 군인들이 치유받는 이야기이며, '말아톤' 역시 모성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남인영교수(동서대)는 "단순히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라 엄마가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 중요하다"며 "엄마와 아들의 정서적 일체감을 강조하는 외디푸스 컴플렉스 또한 가부장적 관계의 대안적 성격을 띈다"고 말했다.

양성희 JES 대중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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