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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판 대처' 성장 엔진 재가동시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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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독일의 첫 여성총리인 앙겔라 메르켈(51)이 이끄는 대연정이 22일 공식 출범한다. 독일 분데스탁(연방하원)은 이날 메르켈 기민당수를 제8대 총리로 뽑는다. 총선 득표 1위인 중도보수 기민당과 2위인 중도좌파 사민당이 연합한 대연정은 1969년 이후 36년 만이다. 총선에서 어느 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함에 따라 각 정당이 연정을 모색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결국 양대 정당이 손을 잡는 대연정을 택함에 따라 의회 내 안정의석을 확실히 차지했다. 총리 자리는 1당인 기민당의 당수 메르켈이 맡았다. 대신 주요 각료직을 2당인 사민당이 차지했다. 이에 따라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등 고질적인 독일병을 치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양당이 얼마나 잘 협력해갈지 주목된다. 유럽의 엔진으로 불리던 독일의 부활이 메르켈이란 여성 총리의 조정력에 달린 셈이다.

◆ 메르켈의 저력=신교도. 이혼과 오랜 동거 끝의 재혼. 자식을 갖지 않은 커리어 우먼. 동독 출신. 독일사회에서 출세하는 데 어느 것 하나 도움이 안 되는 조건들이다. 메르켈은 그래도 정상에 섰다. 정치를 전혀 몰랐던 물리학 연구원이 정계에 뛰어든 지 불과 16년 만이다. 그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이후 서방 주요 국가의 정상에 오른 두 번째 여성이다. 메르켈은 대처와 같이 '철의 여인'으로 불린다. 과학자답게 냉철한 데다 딱딱하다.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과격한 신자유주의 개혁의 전도사라 '독일판 대처'라는 별명도 얻었다.

메르켈은 헬무트 콜 전 총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급성장했다. 기민당 입당 1년 만에 여성청소년부 장관직을 차지했다. 로타어 데 메지에르 전 동독총리는 "콜 총리가 동독 지역과 여성계 배려 차원에서 메르켈을 발탁했다"고 설명한다. 콜은 성실하게 순종하는 메르켈을 편애했다. 그래서 정계에서는 메르켈을 '콜의 아가씨'라고 비아냥댔다. 1998년 총선에서 콜이 패하면서 메르켈의 숨은 실력이 빛을 발했다. 과학자다운 치밀한 계산 속에서 서서히 당권을 장악해 나갔다. 2000년 당수직에 올라 누구도 얕잡아볼 수 없게 됐다. 시사주간 슈피겔은 메르켈의 강점을 세 가지로 꼽는다. ▶소신을 밀고 나가는 뚝심 ▶뛰어난 상황판단력 ▶실용주의 노선이다.

◆ 험난한 앞길=새 정부 출범도 하기 전에 벌써 위기상황을 맞았다. 적자 편성된 내년도 예산문제를 둘러싼 위헌 시비다. 현행법에는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주는 긴급한 상황에서만 적자예산을 허용하고 있다. 야당의 반발은 물론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까지 서명을 거부하겠다고 나섰다. 18일 가까스로 합의된 대연정 정책 합의 내용도 시행과정에서 적잖은 의견충돌이 예상된다.

메르켈의 사방은 경쟁자나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총선에서 정권을 다투었던 사민당이 연정에 참여하면서 내각 14개 부처 가운데 8개 주요 장관직을 차지했다. 부총리는 전 사민당수 프란츠 뮌터페링이다. 외교 장관은 슈뢰더 전 총리의 비서실장을 지낸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며 껄끄러운 대미관계를 주도해온 슈뢰더 정권 외교정책의 설계사였다. 메르켈이 원하는 미국과의 관계회복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이 밖에 개혁작업의 주무부처인 재무.노동 등도 대부분 사민당 각료가 장악하고 있다. 뮌터페링 부총리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사민당과 협의를 거치지 않을 경우 연정은 깨질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관건은 메르켈이 총리의 권한을 활용해 얼마나 정책을 잘 조율해 가느냐에 달렸다. 일단 대연정에서 합의만 하면 상하 양원에선 절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기에 문제없이 통과될 수 있다.

과제는 성장엔진의 재가동이다. 11.6%에 이르는 높은 실업률을 낮추고 1%로 예상되는 성장률(2005년 예상치)을 높이는 개혁을 해야 한다. 일단 슈뢰더 총리가 시동을 걸었던 '어젠다 2010' 이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개혁안은 일일이 사민당과 협의해야 한다. 시사주간 슈테른은 "메르켈은 역대 가장 외로운 총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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