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급기야 대법원장의 항의를 받은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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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란법 사태는 국회가 입법권을 남용한 것이다. 국회는 권리는 이토록 마구 휘두르면서 정작 의무는 내팽개치고 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40일이 넘도록 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임명동의 요청이 들어온 공직 후보자에 대해 국회가 청문회와 표결을 진행하는 건 관련법이 정한 의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 후보자가 1988년 박종철 고문치사 수사팀의 일원으로서 ‘은폐된 고문 관련자’에 대한 추가 수사에 소극적이었던 책임이 있다며 청문회를 거부하고 있다. 박 후보자는 당시 수사검사 4명 중 막내였으며 상관들은 이미 헌법재판관·국회의원 등을 거침으로써 사회의 ‘책임성 검증’을 통과했다. 이런 사실관계와 상관 없이 설사 박 후보자가 논란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청문회는 열려야 한다. 후보자의 설명을 듣고 표결을 통해 판단하라는 게 국민이 국회에 위임한 절차다. 이런 규정을 새정치연합이라는 특정 정치세력이 무시할 수는 없다.

 새정치연합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유로 절차를 가로막자 급기야 대법원장이 국회의장에게 신속한 진행을 요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각 헌법기관은 각자 맡은 절차를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문제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새정치연합의 청문회 거부는 삼권분립과 헌법기관의 의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위협하는 것이다.

 양 대법원장은 “대법관 공석이 장기화한다면 신속하고 적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는 우려도 거론했다. 지금 정원이 채워지지 않고 있는 대법원 2부에는 구 민주당의 대표를 역임한 한명숙 의원의 9억원대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이 계류 중이다. 한 의원은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현역 의원이라는 이유로 법정 구속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 의원이 대법 판결에 따라 법정 구속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새정치연합이 의도적으로 박 후보자 청문회를 막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등장한다. 새정치연합은 이런 시선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원칙과 정도(正道)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