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6)제80화 한일회담(8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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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집권초기에 보여주였던 「하또야마」 일본수상의 적극적인 대한관계 개선태도는 날이 갈수록 엷어져갔다.
대신 그는 은근히 우리에 대해 북한카드를 슬쩍슬쩍 비치는 행동으로 나왔고 그의 그같은 자세가 그의 집권동안 한일회담 재회를 가로막은 요인이 됐다.
55년 봄 일본은 모스크바와 북경을 상대로 각각 국교정상화및 통상관계수립을 교섭했고,그 여파로 북한과도 통상은 물론 인적 교류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교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5월에는 평양을 방문한 일본민간인이 북한과 소위 일· 북한간 민간어업협정을 체결했다는 설이 유포됐으며 중공과 무역협정을 체결한 일본국재통상촉진협회는 북한과도 무역협정을 체결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간끼리의 협정이라는 기묘한 형태였다.
우리 정부는 6월2일 이같은 일본의 협동적 태도를 「자유세계에 대한배신행위」 라고 통렬히 규탄하는 성명으로 대응했다. 정부대변인 갈홍기공보처장은 일본이 북한과 관계를 맺는다면 북한이 우리 영토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침략행의나 다름없다고 전제. 『우리는 일본이 북한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용인할수 없다』 고 강력히 비난했다.
우리측의 강경자세 때문이었는지, 미국측의 반발을 의식해서였는지 하옇튼 일본은 자세를 약간 후퇴시켜 북한과의 통상을 허용할 방침이 없다고 우리 정부에 통고해 왔다.
중천감 아주국장이 6월8일 유태하참사관에게 이같은 사실을 통보한데이어 「하또야마」 수상은 6월17일 아침 일본국회내의 총리실로 김용직공사를 불러 북한과 문화 또는 무역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일체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확약했다. 그는 이같은요지를「시게미슨」(중광규)외상에개도 전달해 두었다고 친절하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막적으로는 일본인의 북한방문을 막지도 않아 53년 10월 대산욱 부부가 평양을 방문한 이래 기자·학자 경제인등의 평양방문을 묵인했다.
그들 중의 어떤 자는 평양방송을 통해 일 북한간의 관계증진을 공공연히 주장했으며 북한외상 남일은 악화된 한일관계에 편승해 7월2일 『지난 5월 방북한 일본통상대표들과 일·북한통상문제를 토의한바 있는데 오는 20일까지 일본통상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부추기는 형편이었다.
북한이 한일관계에 영향을 미치려는 농간을 부리는 것과 시기를 같이해 「하또야마」수상은 또다시 우리을 자극하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7월6일 회견에서 『대북한 무역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느냐』 는 질문에 『한국은 북한과 사이가 나쁜 모양이군』 이라고 말해 한국에 두나라가 있는 듯이 빈정댔다.
그는 또 「구보따」 망언을 취소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뿐 아니라 대한재산청구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수상이라는 정부 최고책임자의 말이라고는 믿을수 없을만큼 무제도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한 신문은 『그는 한 입으로 두 말, 세 말하는 믿을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고 사설에서 혹평할 정도였다.
「하또야마」 수상은 수상이 되기 전까지는 『일본의 극동 제국가와의 친선정책 중에는 한국과의 관계를 공식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큰일』 이라고 주장, 한일회담 실패에 대한 화살을 정적인 「요시다」 수상에게 돌렸던 사람이다.
일국의 수상이 막 존망을 건 전쟁을 치르고 바라지 않은 휴전으로 대치상태에 있는 남북한관계에 대해『사이가 나쁜 모양』이라고 빈정댄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이대통령은 「하또야마」 수상의 말같지 않은 발언을 보고받고 대노, 관계장관들에게 통일보복책을 수립해 시행하라고 엄명했다.
이에따라 외무 삼공 재무장관과 한은총재등이 마련해 8월17일 단행한 대일보복조처는△재일 한국인의 모국방문 금지△대일교역및 여행금지등에 불과했다. 상대방에 보복으로서의 효과를 주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조처였지만 당시 우리가 할수 있었던 최대한의 조처였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대일교역중단을 단행하면 우리가 전후복구에 곡 필요한 물자수입에 오히려 애로를 느끼는 형편이었음에도 단행하지 않을수 없을만큼 당시 한일관계는악화돼 있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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