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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정정 불안 경제난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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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르헨티나의 수도 붸노스아이레스의 명동이랄 수 있는 라바제가와 프로리다가가 만나는 네거리에는 매일 밤 새벽 2시까지 1백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하곤 했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후보를 내놓고 있는 페론당과 급진시민연맹(UCR)의 선거운동원들이 라바제가에 몰려있는 극장들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열띤 선거전을 벌이고있는 모습이었다. 40대의 한 아주머니는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페론당이 집권해야하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는가하면 바로 옆에 서있는 30대의 남자는 급진시민연맹이야말로 아르헨티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외쳐댔다. 73년이후 10년만에 처음 실시되는 총선이어선지는 몰라도 이토록 정치에 관심이 많은 국민이 있을까 싶었다.
10월에 들어 아르헨티나 전국의 도로변에는 건물벽·휴지통·고가도로 할 것 없이 페론당(공식명칭은 사회정의당) 「루데」후보와 급진시민연맹 「알폰신」후보의 이름이 원색의 페인트로 굵직굵직하게 씌어져있었다.
페인트 값만도 엄청나게 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이 나라가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겪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 정도였다.
신문·방솜·TV도 쉴새없이 선거관계보도와 광고 등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런 뜨거운 열기 속에서 예상을 뒤엎고 급진시민연맹의 「알폰신」후보가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0월중순까지만 해도 「루데」후보가 압승하리라고 전망됐었다.
숫적으로도 페론당원이 3백50만명, 급진시민연맹당원이 1백50만명으로 현격한 차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식층과 기업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급진시민연맹은 교육·식량·보건·주택 등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선거공약을 설득력있는 전략으로 홍보하면서 아르헨티나인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4백억달러에 이르는 외채와 절대적인 외화부족, 포클랜드전쟁에서의 패배 등은 아르헨티나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상처나게 했고 8년간에 걸친 군정은 이 나라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폰신」이 숭리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주지사선거에서는 아직도 페론당이 건재하고 있음을 과시했으므로 「알폰신」에겐 페론당과의 협상이 불가피한 과제로 남아있다.
또 정권을 이양하게될 군부와의 타협도 지나칠 수 없는 고민거리다.
남미전체로 볼 때 점차 민정으로 옮겨가는 양상을 보이고있다고는 하나 아직도 브라질·칠레·우루과이·파라과이·수리남 등에서는 군정이 실시되고있으며 나머지 나라들에서도 군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4년전만해도 남미12개 독립국가운데 8개국이 군부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심화되는 경제침체와 국민들의 반발로 하여 군사정권들은 점차 물러나고 있다.
페루는 3년전에, 볼리비아는 작년에 이미 민정이양을 마쳤으며 이번 총선으로하여 아르헨티나도 정권을 넘겨주게 됐다. 브라질·우루과이는 오는 85년에 각각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공약하고있다.
지난 10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해온 「아우구스토·피노체트」칠레대통령은 오는 89년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민정이양을 안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국민들은 인권신장·자유확대와 그의 사임 등을 요구하면서 매달 11일이면 한차례씩 대규모시위를 벌이고있다.
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수리남의 「데시·부테르세」중령도 가까운 장래에는 정권을 넘겨줄 의향을 보이지 않고 있어 최근 그를 몰아내려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4년부터 30년째 정권을 유지해온 군부출신의 「알프레도·스트로에스네르」파라파이대통령은 지난 2월 임기5년의 7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물론 민정으로 옮겨간 나라들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볼리비아에서는 「에르난·실레스·수아소」대통령이 이끄는 좌익연정이 내분을 되풀이할 경우 군부가 다시 정치에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오고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도 민정이양 후의 군부의 태도가 큰 변수로 지적되고 있다.
결국 남미국가들에 있어서 군정이냐, 민정이냐 하는 체제의 형태에 앞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하는 점이 가장 시급한 과제인 셈이다.
3년전 군부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페루의 현 「베라운데」정부의 경우 올해 인플레율이 1백1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9백55달러에 불과한 1인당 국민소득은 페루인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이러한 경제난을 틈타 소련·쿠바의 지원을 받는 좌익반정부세력이 반정부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는 13일에 있을 민정이래 최초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베라운데」정부는 이미지쇄신에 힘쓰고 있으나 경제사정이 호전되지 않고서는 이 역시 큰 성과를 보기 어려우며 더구나 군부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89년까지의 집권을 고집하고있는 「피노체트」대통령하의 칠레는 페루와는 달리 육·해·공군·경찰로 구성된 4인 군사평의회가 입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천57달러(82년)로 남미국가 가운데 높은 수준이지만 실질실업률이 40%에 달하고 대외부채가 2백억달러나 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국내외 반정부인사들을 중심으로 정권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5월부터는 매달 11일을 「국민항의 행동일」로 지정, 반정부데모가 벌어지고 있다.
이같이 민정을 하고있는 페루나 군정하의 칠레는 서로 통치형태를 달리하면서도 똑같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정정불안을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민정으로 돌아서게 된 아르헨티나도 성공의 열쇠는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길뿐이다. 남미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특징은 경제침체가 사회불안을 가중시켜 군정과 민정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는 점이다. 빈곤과 부의 편중을 해소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해나가는 것만이 남미국가들의 정치불안을 종식시키는 최선의 처방이 될 것이다. 【붸노스아이레스=이재명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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