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흰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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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바람이 잘 드는 시원한 뒤꼍에서 그이의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이마와 귓볼에 콜드크림을 바른 후 머리에 염색을 한다. 거울을 앞에 놓고 열심히 들여다 보면서 행여나 살갗에 묻을까봐 조바심하는 그이를 보고 조심스럽게 빗으로 이리저리 빗기면서 솔로 머릿결에 염색을 한다.
이발소에서도 할 수 있으나 이발료보다 곱절 더 받으니 집에서 조금만 수고를 하면 한번 더 이발할 수 있는 돈을 절약할 수 있다. 문득 결혼할 때 주례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신부 ××는 신랑××를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같이 존경하고 괴로울 때나 슬플 때 나 고락을 같이 할 수 있겠느뇨』하고 물었을 때 나는 모기소리만큼『예』하고 대답하고, 그이는『예』하고 어찌나 크게 대답했던지 식장의 축하객들이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벌 써 결혼한지 15년이 되었다. 발랄하고 패기넘치던 그이의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생기고 40을 넘어선 눈가에는 잔주름이 수없이 그어져 있다.
오늘 이렇게 머리에 염색하면서 우리도 어느새 중년을 넘어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이들 셋은 중2, 국민학교 6학년과 4학년이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던 일과에서 조금은 놓여나 이제는 제법 내 시간을 가질수 있어서 나 대로의 취미생활을 할수 있다. 뜨개질도 하고, 수예도 하고, 강연회나 문학회에도 나가면서 그것도 부족해 책을 사갖고 와서 밤을 새워가며 읽기도 한다. 그런 나를 보고 그이는 대견한 듯이, 그리고 조금은 부러운듯이 쳐다보지만 오로지 직장과 가정을 다리삼아 열심히 뛰어다닌다. 어쩌다가 쉬는 날이면 집안손질도 해야하고, 막힌 하수도도 뚫어줘야하고, 부러진 선반도 고쳐줘야 하니 여러가지로 피곤한가보다.
그저 말없이 성실하게 직장에 충실하고 가정에 충실한 그이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오늘 저녁 식탁에는 인삼 몇뿌리를 넣고 삼계탕을 끓여 늘 수고하는 그이에게 소주라도 한잔 권해야겠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와서 조금은 서글픈 그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리라. 우리는 비탈지고 고달픈 삶을 지혜와 인내로써 이겨나가는 좋은 동반자임을 이야기하면서 ...<부산시 부산구 혁읍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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