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미노하합에 모든힘 쏟겠다" 신임 진의종총리가 말하는 국정 방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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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국민은 장래가 있는 국민입니다. 평소에는 다소 불평불만이 있으나 나라가 어려울때 대국적 견지에서 화합하여 국난을 극복하려는 자세에 감복했어요.』
금년3월 민정당대표위원으로 취임한지 불과 반년남짓만에 재상의 자리에 오른 진의종신임국무총리서리는 먼저 최근에 연속된 불행한 사건들을 지적,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키 위해 국민화합에 모든 힘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취임포부를 밝혔다.
5대국회때 부터 7번출마해 3번당선하는 풍파를 겪은 그가 5공화국에 참여하고서 부터 승승장구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성제대를 나와 22세에 일본고문에 합격, 삼공부전정과장으로 관계에 발을들여 놓은후 상공차관까지올랐다.
4·19직후「관계가 너무답답해 좀더 큰일을 해보기위해」5대선거에 출마한후 7대까지 연거푸 3번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때 가산을 모두 탕진해 경기중학다니던 장남의 치료비가 없어 제대로 입원도 못하고 죽는 불행도겪었다.
그시절을 그는 『나에게 주는 시련이라고 생각했지 낙담하거나 자포자기한적이없다』고 회상했다.
맘씨좋은 할아버지의 체취를 풍기는 그는 인생의 좌우명도 「미소하는 인생」이라고 밝혔다. 안방에 걸어놓은 허백련선생의 「난여춘풍」(마음가짐을 봄바람처럼 가지라)이라는 휘호가 그에게 걸맞은것도 같다.
마음의 여유를 갖기위해 지금도 한가할때면 혼자 연극구경을 가끔가는데 앞으로 정책을 추진히는데도 그런 여유가 필요할것 같다고 했다.
『정치·경제·사회모든면에서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낡은 의식부터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의식개혁도 너무급하게 서두르면 무리가 따르지요.』
정치공백기때마다 그는 많은 직장을 거쳤다.
대한주택영단이사·호남비료전무·대한교육보험부사장·울산비료전무·한국전력부사장에다 10대의원에 낙선된후에는 율산회사회장도 맡았다.
그러나 지금와서는 그러한 편력이 사물을 판단하는데 큰도움이됐다고했다.
8,9대신민당의원을 지내면서 논리정연한 대정부질문을 해 경제관료로부터「경제의 핵심을아는 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그를 벌써부터 「정경총리」로 부르는 사람도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경제정책·시정방향등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임명장이나 받은후에 얘기합시다』며 대답을 피한다.
신임 신병현부총리와는 야당 국회의원 시절 안면이있는 정도나 그의 경제철학은 잘 알고있다고했다.
전에 야당을하다 지금은 여당을하지만 변신은 아니라는게 그의변.
『제5공화국이 되면서 새이념에 찬성하는 사람은 구여야를 막론하고 다모였던만큼 야당을하다 여당을한다고 말하기는어렵지요) 그는 6개월남짓이란 민정당대표위원자리가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명예스러운자리라 다음 선거때까지만이라도 맡았으면했는데…』하며 아쉬워했다.
행정부의 총수가 된 그는 요즘 공무원의 사기저하를 걱정했다.
『우리나라가 짧은기간에 이만큼 발전한데는 공무원의힘이 컸습니다. 앞으로 공무원들이 국가에 봉사하는데 보람을 느낄수 있도록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여러면에서 사기를 올려야겠읍니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는부인 이학여사(61)의 뒷바라지가 컸다고들 한다.
선거에 떨어져 낭인생활을 할때면 부인 이여사가 자수와 서예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부덕이 인정받아 신사임당상까지받았다.
올가을 개인전을 위해 2층서재에는 부인의 서예·자수작품이 그득했다.
2남2녀의 자상한 아버지가 총리로 임명되던날 마침손자 원상군의 돌이었다.
노모 박소아씨등 친지들이 돌떡을 들다가 총리임명소식을 들었다.
이여사는 소감을 묻자『소감을 뭐라고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소감조차도 남편의 뜻을 따르겠다는 겸손을 보였다.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 공적인 일을 해왔기 때문에 돈을 번다거나 하는데는 우둔한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현재 종로구 부암동 집을 20년동안 지키고 있을 정도로 외곬 일면도 있다.
『맡은일을 그날 그날 착실히 해야 쓰겄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하겄읍니다.』전라도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로 나름의 자세를 다짐했다.<문창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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