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의 소곤소곤 연예가] 여성 로커 마야, 건망증 해도 너무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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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가수 마야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6월 '비타민' 첫 녹화장이었다. 보석 같은 끼가 다재다능하다는 얘기에 신인임에도 고정 게스트라는 파격적 캐스팅을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에 마야는 드라마 '보디가드' OST를 부르며 차승원의 여동생 역할을 맡았는데 점점 역할 비중이 늘어나자 녹화 스케줄이 겹쳐 아쉽게 그만 '비타민'과의 인연을 3회로 접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대학 축제 섭외 1순위이자 한국 록의 한 획이 된 여성 로커 마야를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머, 마야씨 너무 반가워요. '비타민'에서 첨 봤을 때보다 더 예뻐지고, 멋있어졌네."

"네? 제가 '비타민'에 나갔나요? 언제요?"

앗, 세상에 이런 일이. 첫 예능프로그램 출연이라 기억할 법도 한데 동글동글한 눈 크게 뜨고 애절한 눈빛으로 쭈뼛쭈뼛 진심을 꺼낸다.

"사실은 저한테 정말 치명적인 결함이 있거든요. 건망증이 너무너무 심해서 제가 뭘 했었는지 기억도 잘 못 한다니까요. 심지어 제 휴대전화 번호도 모르는걸요. 이 말도 안 되는 기억력 때문에 정말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방송국에서 자주 마주치는 기자분들인데 보고 못 본 척 인사 안 한다고 건방지다는 얘기도 들었죠."

덕분에 누가 먼저 알은척해 주면 그것이 그리 반가울 수 없다는 못 말리는 건망증 소녀, 마야. 더 기막힌 사실은 건망증 합병증으로 무대 공포증까지 생겼다고.

"명색이 가수인데 가끔 노래 부르다 갑자기 가사가 생각 안 나요. 특히, 관객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꼭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가능한 한 눈을 꼭 감거나 허공을 보며 노래 부르려고 하죠."

그런데 알고 보면 마야를 진짜 가수로 만든 것이 바로 이 건망증이었다. 본인이 가사를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노력에는 장사 없다고 같은 노래를 수백, 수천 번 듣고 또 듣고. 목에서 피가 날 때까지 부르고 또 불렀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폭발하는 가창력을 갖게 된 것. 요즘도 노래 가사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 순간이 가장 짜릿하고 기쁘다는 마야를 보며 과학자 뉴턴이 생각났다.

뉴턴도 소문난 건망증 일화를 많이 남긴 사람이었지만 역사는 그의 건망증을 집중력으로 기억한다.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던 순간, 하고 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린 뉴턴. 그러나 그는 건망증을 놀라운 집중력으로 승화시켜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했다. 문득, 나도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건망증도 잘만 극복하면 자신의 운명은 물론 세상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마야와 뉴턴처럼.

이현주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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