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지휘권 발동의 역사적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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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제를 하는 사람들은 일을 비용과 효과 면에서 보는 버릇이 있다. 헌정사상 처음인 이번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어떤 계산에서 단행되었으며 그 충격과 후폭풍은 고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심모원려(深謀遠慮)적 계산이 있는 것일까.

이제까지 한국에서 지휘권 발동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노골적인 방법을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휘권이란 비상용 소방차와 같아서 안 쓰는 게 가장 좋다. 한번 출동하면 소란스러운 역사적 실험이 된다. 일본의 경우는 52년 전에 한번 실험을 하고는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 두 번 다시 시도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1953년 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때의 일인데 검찰이 조선의옥(造船疑獄)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 당시 집권여당인 자유당의 사토(佐藤榮作) 간사장과 이케다(池田勇人) 정책의장 등 정치인들이 다수 연관되어 있었다. 사토는 3회, 이케다는 4회나 강도 높은 검찰조사를 받았다.

두 사람은 정치헌금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우선 사토 간사장을 수뢰 혐의로 구속할 방침을 세웠다. 검찰 내부에서도 개인 치부가 아니라는 신중론이 있었으나 강경파에 밀렸다 한다. 내각제 아래서 여당 간부의 구속은 국정 운영의 차질뿐 아니라 내각 붕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법무상이 검찰총장에게 신중한 처리를 몇 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요시다 총리는 부총리와 법무상을 불러 긴급협의 끝에 지휘권 발동을 결정했다. 검찰은 그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여론이 들고 일어나고 세상이 크게 시끄러웠다. 법무상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요시다 정권은 그해 말 총사직했다.

당시 요시다 총리가 지휘권 발동을 결심한 것은 정치자금 문제를 건드리면 일본의 정계, 특히 보수계가 치명적 타격을 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체제 위협으로 생각했다. 거기 덧붙여 유망한 정치인으로 키우고 있던 사토와 이케다를 정치적으로 살리기 위한 포석도 있었다 한다.

후에 사토와 이케다는 나란히 일본 총리가 되어 큰 업적을 남긴다. 이케다는 60년부터 4년 동안 집권하면서 안보투쟁으로 험악해진 사회 분위기를 경제 우선으로 돌려 그 유명한 소득배증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사토 총리는 이케다의 뒤를 이어 7년 넘게 집권하면서 일본의 고도성장을 지속시켰고 한.일협정 타결, 오키나와 반환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요시다.이케다.사토는 모두 전후 가장 뛰어난 총리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래서 지휘권 발동의 판단도 일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법조계 원로들도 당시 검찰이 너무 의욕적이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조선의옥 수사에 참여했고 나중에 검찰총장을 지낸 이토(伊藤榮樹)는 회고록에서 "지휘권 발동 소식을 듣고 허탈감과 아울러 '후유'하는 기분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토 체포 후에는 이케다 등 줄줄이 정치인 체포가 예정돼 있었는데 이 사건이 어디까지 번질 것인가, 일본의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막연한 불안이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번 지휘권 발동도 길게 보아 일본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당장의 검찰 독립성 문제보다도 그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그러려면 이번 사건이 지휘권을 발동할 만큼 중대한 문제냐, 이렇게 강정구 교수 사건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 사회에 어떤 득실이 있느냐 하는 계산을 해야 한다. 요즘같이 이념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국가의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강 교수를 보호해 어떤 상징이나 신호로 삼으려 했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이고 비장한 결의 없이 정치적 판단으로 했다면 계산을 크게 잘못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는 해답이 나와 있지만 입장과 잣대에 따라선 전혀 다른 계산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최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