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빠진 북·중·러 정상 모임 … 난감한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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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5월 러시아의 전승 7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남북 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관건이지만, 이를 각기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중·일·러 4강국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처리해야 하는 문제도 우리 외교에 큰 숙제로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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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22일 박근혜 대통령의 러시아 전승 기념식 참석 여부에 대해 “5월 일정은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 여러 일정이 경합하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검토할 내용”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가면 박 대통령도 참석하는 것이냐는 질문에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복잡한 ‘외교 고차방정식’에 직면한 청와대의 신중함과 고민이 간접적으로 묻어나는 답변이다.

 정부의 기본 입장은 앞으로 몇 달 동안 남북관계 전개 양상을 면밀히 주시하며 신중하게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염두에 둬야 하는 대상은 북한뿐만이 아니다. 우선 냉전이 끝난 이후 최악이라는 미·러 관계가 큰 부담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뒤 미국은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하는 기조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신년연설에서도 러시아를 수차례 공개 비판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을 자신의 외교적 성과로 자평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공식 초청장을 보냈지만, 미국은 아직 답을 주지 않고 있다.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은 20일 존 테프트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인용해 “아직까지 오바마 대통령이 모스크바에 올 계획은 없다”고 보도했다. 고위 외교 소식통은 “오바마 대통령 임기 안에는 러시아와 잘해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공감대가 미 국무부에 형성돼 있다”고 귀띔했다. 또 “오바마 대통령만 쏙 빠진 채 남·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서는 것은 한국 정부로선 난감한 그림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집권 이후 첫 국제 외교무대 데뷔 카드를 만지고 있는 김정은 제1위원장과 치열한 수싸움도 해야 한다. 최근 들어 러시아는 북한과 경제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전승 기념식 ‘흥행’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제재에도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계산이다. 때문에 러시아는 강력한 흥행 카드가 될 수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방러에 공을 들이는 양상이다.

 새해 들어 북·중 관계도 전환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이후 양국 공식문서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16자 방침’의 복원 입장을 연초에 밝혔다. 16자 방침은 과거 북·중 관계의 기본원칙으로 통했다. 올해 베이징이든 모스크바든 시진핑과 김정은 집권 이후 첫 북·중 정상회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북·일 사이에 일본인 납북자 문제를 놓고 협상이 급진전하는 시나리오도 정부는 염두에 두고 있다. 일본 언론은 납북자 문제 해결에 주력해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모스크바에 가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는 아베 총리에게도 이미 초청장을 발송했다.

 중·러가 모두 박 대통령에게 전승 70년 행사 ‘러브콜’을 보낸 것은 더 고민이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방한 때 항일 전쟁 승리를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박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한국이 중·러 모두와 의미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 행사를 함께 할 경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6월 22일) 의미를 그보다 중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줄 수 있다. 부담을 줄이려면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데, 돈독한 한·중 관계를 만드는 데 애써온 정부로선 남북 정상회담만 염두에 두고 러시아 행사를 택하기도 곤란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도적인 외교를 펼 것을 주문했다. 이화여대 박인휘(국제관계학) 교수는 “남북관계만 볼 것이 아니라 북한을 관리하는 통로로 한·중, 한·러 관계를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산정책연구원 봉영식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10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북한 실세 3인방이 참석했을 때 정부는 정상회담에 매달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실수를 해 북한이 몸값 올리기를 했다”며 “5월 행사 참석 여부를 성급히 결정하기보다는 우리가 얻으려는 목표 설정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안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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