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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요환의 배틀배틀] 팬이 찍어주는 사진, 팬레터 같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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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팬들이 찍어주는 사진은 일종의 박수다. 게이머를 향해 멋지게 날리는 휘파람이다. 그래서 프로게이머들은 팬들이 찍어준 사진을 소중하게 여긴다. 특히 인터넷을 떠돌다 보면 작품 사진 못지 않은 프로게이머의 사진을 종종 접한다. 물론 팬들의 작품이다. "이거 내 사진 맞아?" "아냐, 포샵(포토샵 편집) 했겠지" 이런 농담을 수시로 주고받을 만큼 깊은 애정을 가진다. 어떤 선수는 너무 마음에 드는 사진을 본 뒤 그걸 찍어준 팬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평소 사진 찍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선수들도 팬들의 카메라 앞에선 대부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프로게이머들은 그런 사진을 '팬레터'처럼 여긴다. 자신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는 것은 물론 동료 선수의 바탕화면을 몰래 자신의 사진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그런 장난 뒤에는 자신의 팬에 대한 자랑이 은근히 깔려 있다.

선수들이 가장 아끼는 사진은 경기 장면이다. 전장에 나선 전사, 오직 이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뿜어내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물론 프로게이머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나는 야구와 축구.농구 등 모든 스포츠에서 그런 순간을 느낀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질끈 다문 입술, 꿈틀대는 근육, 매서운 눈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한 대목처럼 그 속에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의 부리질,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절실한 발길질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팬들의 사진이 항상 용기를 주는 건 아니다. 인터넷에는 얼굴 사진으로 장난을 치는 이들이 꽤 많다. 유머러스한 것도 있지만, 상당히 불건전한 합성사진도 있다. 나도 연예인들의 합성 사진이 주로 올라가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수영장에서 미끄럼을 타던 내 사진이 타깃이 되더니 순식간에 수십 장의 합성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망신스러운 사진이었다.

사진은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다. 매순간 뒷걸음질치면서 사라져가는 삶의 모퉁이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게끔 하는 단서다. 추억으로 달려가는 이정표 말이다. 나는 팬들과 좋은 추억, 좋은 사진을 많이 나누고 싶다. 10년, 20년, 아니면 30년쯤 지나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사진 한 장. 앞으로 내가 가꾸고 싶은 삶도 거기에 있다.

<프로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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