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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가을이면 생각나는 안토니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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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느새 가을 종(鐘) 소리가 요란하다. 머지않아 은행나무는 노란 폭우를 뿌릴 것이고 그 비는 봄 열꽃이 터지기 시작했을 아르헨티나와, 그곳에서 만났던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함께 불러올 것이다.

3년 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있었던 늦가을의 만남! 밖에는 앙상한 나무 사이로 비안개가 흐르고, 안에서는 피아졸라가 연주하는 탱고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 가까이에서 그의 눈빛을 보고 두 번 놀랐다. 그 가을 호수처럼 가라앉은 고요함에, 이어서 폭풍의 핵처럼 사나운 소용돌이에 또 한번 놀랐다. 그것은 극 중 인물에 몰입한 촬영장에서의 모습과 그 배역에서 벗어난 뒤의 상반된 모습에서 느꼈던 당혹함과 유사한 것이다. 그 당시 안토니오는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파헤치기를 주제로 한 영화 촬영을 위해 남미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작사가 요청한 우리 집 앞에서의 촬영은 나의 한국음식으로 마련한 저녁식사 초대로 이어졌지만 양측의 어긋난 일정으로 깨지고, 결국 우리의 만남은 그가 마돈나와 함께 영화 '에비타'를 찍었을 때 묵었던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이뤄졌다. 우리는 초면임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많이 얘기하고 웃었다. 불현듯 '아니 내가 지금 누구와 수다 떨고 있는 거지? 바로 세계적인 명배우 아냐?' 하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가 일찌감치 제거해 놓은 대화의 브레이크는 화제의 메뉴판을 마냥 다채롭게 만들었다.

상대방에게 그저 예술을 사랑하는 한 남자로, 마음 편한 라틴친구로 착각하게 만드는 모습은 그지없이 자연스러워서 혹시 고도로 계산된 PR전략이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들었다. 몇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의 진면목을 느끼기에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미남임에 분명하지만 다른 할리우드 스타와 달리 키도 크지 않다. 깎아놓은 밤톨처럼 매끄럽지도, 그리스 조각처럼 극적인 굴곡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다른 스타들이 흉내낼 수 없는 라틴 남성 특유의 뜨거운 가슴과 쇠 심줄 같이 질긴 집념을 가졌다. 또 섬세한 감정을 징그러울 정도로 잘 드러내는 눈망울과 느끼하지 않게 비웃을 줄 아는 입술과 무엇보다 어느 고대광실보다도 큰 지식의 곳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늘의 세계적인 대스타가 되기까지 발목 부상으로 접었던 축구선수의 꿈, 무명의 긴 수련기간, 할리우드의 매서운 텃세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영어 한마디도 모르고 시작한 할리우드의 첫 작품 '맘보 킹' 촬영 때는 영어발음을 서반아어로 일일이 적어서 외우며 연기했지만 특유의 매력과 카리스마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조국인 스페인을 벗어나 전 세계로 향한 발길질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절망에 빠질 시간도 없을 만큼 절박한 위기도 많이 겪었어요. 그러나 그런 시련이 나에게는 보약이었어요" 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언제나 음악과 회화.문학 등 주변 문화예술에 대해 큰 창을 매달아 놓고 살아서 그 분야 전문가와 막힘 없이 대화를 이끈다. 그가 액션, 로맨스, 뮤지컬, 만화영화 더빙 등의 다양한 분야를 소화해내는 원천이 바로 이 지식 에너지다. 거기에 타고난 유머감각과 전방위로 열어놓은 호기심의 촉수, 그리고 자신을 매끄럽게 풀어놓을 줄 아는 마케팅의 고수(高手)이기도 하다.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성장한 한국의 영화산업이 이제 새 장을 쓰기 위한 전환점에 선 듯하다. 곧 그 중심에 톱스타의 자질 문제가 소용돌이 칠 것이다. 예술혼의 무게와 함께 저울에 올려놓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답의 한 조각을 안토니오의 치열한 자기수련, 타 예술 분야 전반에 대한 해박함,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 무엇보다 비범함을 감추는 겸허함 등의 내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강원 시인·세계장신구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