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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마이웨이⑪ 뮤지컬 배우 남경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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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주. [사진 중앙포토]

지난 12월, 나는 생전 안 해보던 일에 도전했다. 토크와 노래가 어우러진 ‘뮤직토크’ 공연 진행자로 무대에 선 것이다. 그것도 뮤지컬계의 스타인 김지현·남경주와 함께. 소식을 듣자마자 주변 여성들은 "부러워 죽겠다"며 흥분했다. 내 또래 아줌마부터 딸 또래 20대들까지 반응이 한결같았다. 새삼 남경주(50)라는 배우의 놀라운 스펙트럼과 ‘지속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그는 ‘역시’ 남경주였다. 이제 막 50대의 문턱을 지났지만 변함없는 노래와 춤, 그리고 집중력은 그야말로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데 공연을 하면 할수록 내 눈과 귀를 잡아끈 이들이 또 있었다. 남 씨가 데려온 5인조 코러스다. 한마디로 지금껏 봐온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노래를 하다 말고 갑자기 군무를 추질 않나, 애드립으로 '알아서' 분위기를 띄우고 무대를 뛰어다니며 관객의 호응까지 끌어낸다. 한 명 한 명의 몸짓과 눈빛이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뛴다. 어디서 저런 괴물들을 데려왔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의 제자들이란다.

"제가 공연을 하면서 알게된 친구들인데 끼와 열정은 있지만 뮤지컬 오디션에 번번이 떨어지곤 했죠. 지켜보다가 안타까운 마음에 먼저 제안했어요. '딱 1년만 나랑 워크샵 하자. 수업료는 안 받는다. 대신 그동안은 공연 금지다'라구요"

진성·두성 섞는 창법 배우는 중

그렇게 '남경주와 열두 제자'의 특별한 공부가 시작됐다. 남의 연습실을 빌려 함께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품앗이 교육을 받았다. 그가 탭댄스를 가르쳐주는 대신 제자들에게 발레를 배우게 하는 식이었다. 읽었던 책들도 몽땅 주며 ‘배우란 무엇인가’부터 다시 고민하게 했다. 약속한 일년이 지났을 무렵, 열 두 명은 눈빛부터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오디션을 통과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인간 남경주’가 다시 보였다.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 ‘일가(一家)를 이뤘다’고들 한다. 그 본래 의미는 가족 이외에 먹여살리는 식구를 만드는 일, 즉 사람을 키우는 스승이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게 보자면 남경주야말로 글자 그대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이처럼 그가 남다른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오랫동안 성실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공부욕심은 어디서 뒤지지 않는데 옆에서 본 남 씨는 감탄스러울 정도다. 가방에는 항상 영어교재가 들어있고 틈만 나면 발을 움직이며 탭댄스를 연습한다. 요즘에도 선생님을 모셔서 레슨을 받는단다. 심지어 진성과 두성을 적절하게 섞어 쓰는 창법까지 배우고 있단다. 30년 경력의 뮤지컬 배우가 말이다.

“오십 넘은 제가 노래와 춤을 배운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곤 해요. 외국에서는 당연한 일인데요. 트럼펫 주자들이 시도때도 없이 피스를 불면서 감각을 유지하는 것처럼 배우도 마찬가지에요. 스스로 조율하는 일을 멈추면 튜닝 안된 악기처럼 삐걱대기 시작하죠.”

개미처럼 배우고 익히다 보니 유명해져

물론 어렸을 때부터 그가 이랬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언제나 공부는 뒷전. 디스코텍에서 춤추고 여자들과 노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1세대 뮤지컬 배우인 형님(배우 남경읍)의 영향으로 배우를 꿈꾸면서 반전이 시작됐다. 공부가 곧 놀이가 된 것이다. 대학 때부터 연기·노래·춤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아다녔다. 잠실 뒷골목에서 이름난 춤꾼들에게 브레이크 댄스와 로봇춤을 배우고 해방촌까지 찾아가 탭댄스를 익혔다. 대학 졸업 후 그가 들어간 시립가무단과 서울예술단은 배움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사물놀이·승무·살풀이 등을 인간문화재에게 직접 배웠고 뮤지컬의 역사같은 인문학 강좌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공부는 그에게 30년 넘는 습관이 돼 버렸다. 그의 말마따나 ‘큰 꿈을 갖고 도전했다기 보다 개미처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사이’에 어느새 뮤지컬 계의 간판스타가 돼 있었다. 그가 지금껏 공부했던 모든 것들이 수많은 경쟁을 뚫고 정상에 올라서게 한 뿌리가 된 것이다. 그 때는 남경주라는 이름 석자를 알리는 게 그저 좋았단다. 여성팬들이 환호해주면 더 보여주고 싶어서 ‘오버’도 많이 했다. 삼십대까지도 그런 모습은 여전했다. 캐스팅 제의가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쇼프로 진행자, 라디오 DJ까지 시키는 건 다 했다. 그렇게 매일 어마어마한 스케줄 속에서 살다보니 문득 회의가 들었다. 잠깐만,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 거지? 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일을 힘들게 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의 답을 찾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쉼’의 의미와 가치를 배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2년만에 다시 돌아온 뮤지컬계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가 ‘연기가 예전같지 않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들어야 했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주연으로 캐스팅됐다가 갑자기 계약이 무산되는 일도 있었다. 그 때 그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단다.

“그날 분장실에서 펑펑 울었어요.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졌죠. 그런데 이걸 못 받아들이면 배우를 관둘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저도 나이가 들고 언제까지나 주연만 할 수는 없으는 노릇이니까. 그때부터 배우라는 직업의 가치에 대해서 참 많이 고민했어요. 무슨 말인지도 몰랐던 두꺼운 책들도 열심히 읽었죠.”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사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어제까지 했던 것처럼 ‘다시’ 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그렇게 책 속에서 수많은 선각자들을 만나 위로를 받기도 하고 삶의 단서를 얻기도 했다. 요즘 그의 화두는 ‘자연스러움’이다. 유명 배우 우타 하겐(Uta Hagen)이 쓴 『배우수첩』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단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 애쓰고, 깊은 인상을 남기는 데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 큰 고통 없이도 승리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단순하고 절도있는 연기를 한다면 심각한 절망과 외로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을 견뎌 낸다면 연극무대는 당신에게 생명력과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이다.’

나 자신 아니 배역을 위해 연기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자칫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수도, 관객반응을 끌어낼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알게 됐단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남는 사람은 배역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그 배우라는 것을. 예전에 그의 연기는 보여주기 위한, 박수 받기 위한 연기. 배역보다는 남경주라는 배우가 돋보이는 연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보다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삶의 이야기와 인물을 오롯이 담는 연기를 꿈꾼다.

“형님이 늘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저도 무대에서 어떤 역할이든 자연의 일부분처럼 그 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면서 할 일을 다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지금 하는 공부도 자연의 순리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일종의 발버둥이죠(웃음).”

어떤 직업이든 30년간 무르익으면 자연을 닮아가는 것 같다. 내 일 속에 담긴 수많은 희로애락, 영광과 모욕을 오가면 어느 순간, 마치 저무는 가을 나무처럼 저절로 많은 것을 내려놓게 된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이미 가득 찼다는 얘기와도 같다. 생명력이라는 나무의 근원을 돌아보면 지금 열매가 있나 없나는 크게 상관이 없다. 다만 나를 키워준 일에 감사하게 되고, 배우로 살고 있는 지금이 행복해진다. 그리고 애쓰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서 누군가가 잠시 쉬어갈 나무가 되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아름답게 무르익어가는 그에게 오늘 참 많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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